"법관은 갈채를 받기 어려운 숙명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지난달 19일 취임식에서 내놓은 권영준 대법관의 취임사 중 한 구절이다. 재판의 속성과 법관의 숙명을 잘 표현한 말이다. 결국 당사자들의 승소 혹은 패소가 있어야 결론이 나는 게 재판이다. "현명한 결정에 존경을 표하는" 재판 당사자의 맞은편에는 판사를 원망하며 울분을 토하는 상대방이 존재한다. 형사 재판도 예외가 아니다. 무죄판결이 아닌 바에야 흔쾌히 승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 사건과 관련, 판사의 성향 논란이 점점 커지고 있다. 명예훼손 사건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된 것은 물론 이례적이다. 하지만 억울하다면 상급심을 통해 다툴 일이다. 고교 및 대학 시절 글을 근거로 '노사모 판사' '정치적 판결' 운운하는 것도 과도하다. 문제는 해당 판결을 내린 박병곤 판사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된 소셜미디어 글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점이다. 법관 재직 시 남긴 박 판사의 글이 사실이라면 그의 친야당적 지향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개인의 성향 자체를 시비할 일은 아니어도 민감한 정치적 사건에서 개인적 정치 성향에 치우친 결론을 내렸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2020년 10월 26일(현지시간) 에이미 코니 배럿 신임 미국 연방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적 기관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성향'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직무를 수행할 것을 선서합니다." 배럿 대법관에 대한 인준 과정에서는 그의 '뼛속까지 보수' 성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해 대선 관련 소송전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 대법원의 6대 3 보수 우위를 다지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속셈 역시 비판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성향(my own preferences)'으로부터 독립하여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다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대선 후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소송을 각하하였다. 광범위한 선거조작이 있었고, 대법원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트럼프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적 성향의 다른 대법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각 주의 선거 결과를 확정하는 권한은 주에 있다는 법리를 확인하는 데 있어 보수와 진보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2022년 6월 여성의 임신중단권리를 부인한 대법원 판결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배럿 등 5명의 보수 대법관 모두 과거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바꾸는 결론에 동참하였다. 그들의 보수적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사실을 비판하는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
국민의 기본권, 보편적 인권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법관의 성향에 따라 다른 판결이 있을 수 있다.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헌법과 법률의 해석도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에 있어 법관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4번째로 기소되었다. 조지아주 검찰에 의한 기소이기 때문에 내년 대선에서 '트럼트 대통령'이 재탄생하더라도 셀프사면은 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감옥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은 헌법상 의무를 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경우 역시 연방대법원은 소송을 각하할 것이다. 여러 비판이 제기되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이 갈채를 받는 이유라 할 수 있다.
dinoh7869@fnnews.com 노동일 주필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