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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잔다르크, 유관순 그리고 도종순

[차관칼럼] 잔다르크, 유관순 그리고 도종순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프랑스 왕을 구했던 잔다르크나, 대한의 독립을 원했던 유관순은 모두 안다. 그렇지만 도종순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조국의 위기에 나선 어린 소녀들로, 결국 청춘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도종순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2월 대한민국 육군첩보부대(HID)에 자원한다. 1951년 말경까지 첩보부대에 근무하다가 작전 중 실종되는데, 국군 정보사령부는 그녀가 이 무렵 사망했을 거라고 판단한다. 유족에게는 '특수임무 수행 중 1951년 12월 31일 ○○지구에서 전사했다'고 통지한다.

한편 국가는 지난 2004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이 법률에 따라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위 심의위원회는 도종순이 1951년 11월까지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은 맞지만, 그 사망 시기는 다르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에 따르면 도종순은 1951년 11월경 작전을 나갔다가 본부와 통신이 끊어지면서 고립됐는데 미 극동군 공군사령부 소속 부대에 의해 구출됐다. 그 후 미 극동군 사령부 소속 첩보부대인 호염부대로 소속을 전환해 근무하다가 1953년 7월 평안도 철산군 앞 순도라는 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적진에서 전사한 탓에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사라진 딸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늙어간 아버지는 더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즈음 막내에게 누나의 행적을 찾아보라고 한다.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누나의 행적을 찾아 나선 동생은 누나가 첩보부대원으로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동생은 처음에는 누나가 한국군 첩보부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에 전사한 줄 알았다. 대전현충원 충혼탑에는 도종순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그러다 나중에 누나가 2년간 더 생존해 있었고, 더 많은 작전을 수행하다가 1953년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엉뚱한 사태가 벌어진다. 대전현충원에 있는 도종순의 이름이 검은색 테이프에 붙여진 채 삭제된 것이다. 유족으로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정은 이렇다. 관련 보상법 시행령은 군 첩보부대에서 외국군에 소속된 첩보부대를 제외하고 있다. 도종순은 미군 소속 첩보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전사했으므로, 혜택을 유지할 법적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특수임무 수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오히려 걸림돌이 돼버렸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유족의 안타까운 사정을 고려해 도종순이 미군으로 완전히 소속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한국군으로서 미군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시 심의해 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상심의위원회는 재심의에서도 여전히 한국군 소속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유족의 신청을 기각했다. 시행령의 한계를 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합당한 예우와 보상은 꼭 필요하다. 권익위는 관련 시행령 개정이나 '참전유공자법'이나 '6·25비정규군 보상법' 등 다른 법률을 통한 보상방법도 살펴보고 있다. 도종순이라는 이름이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잔다르크로 자리매김이 될 수 있도록 모두 노력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