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9월 29일자에는 효장세자의 생인손에 민들레를 붙여 치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측은 <본초강목>에 그려진 포공영(민들레) 그림이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효장세자(孝章世子)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는 효장세자가 어릴 적 요절하고서 7년 이후에 태어난 이복동생이다. 효장세자가 모름지기 장자이자 종묘사직을 이을 후사였다.
효장세자는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서 난 다음 해 음력 2월에 7세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해 음력 8월 심한 열감기를 앓게 되었다. 의관들의 탕약을 처방하면서 열은 잡히는 것 같았지만 몸의 상태는 쉽게 회복을 보이지 않았다. 음력 5월에는 두창(痘瘡)을 가볍게 앓은 적이 있고, 이후 감기에 걸려 회복되자마자 또다시 감기에 걸린 것이다.
효장세자는 몸이 마르고 병약했으며 평소 잦은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영조는 “논어에 ‘부모(父母) 유기질지우(唯其疾之憂)'라고 하였으니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만을 우려한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되는구나”라고 하면서 항상 세자의 건강을 걱정했다.
음력 9월의 어느 날, 효장세자는 감기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동궁(東宮) 뜰을 거닐 정도가 되었다. 당시 동궁에는 대추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동궁 정원을 산책하다가 붉게 물든 대추를 한 개 따 보려다가 그만 큰 가시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아얏~!”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신하들이 “저하~ 무슨 일이시옵니까?”하며 놀랐다. 신하들이 보기에 분명 대추나무 가시에 찔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효장세자는 “아무 일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하면서 오늘 일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렸다.
효장세자는 어린아이임에도 항상 의젓했고 참을성 또한 강했다. 왕세자의 손가락이 대추나무 가시에 찔렸다면 분명 신하들도 문책을 받을 것이고, 아바마마에게도 전해져 또다시 걱정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견디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였다.
대추나무의 가시는 무척 크다. 대추를 원래 한자로 대조(大棗)라고 하는데, 대추나무 조(棗) 자는 가시 자(朿) 자 두 개가 붙여진 것으로 그만큼 가시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추나무를 가시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대추나무의 가시는 크고 굵어서 어른들도 한번 찔리면 그 통증이 대단하고 상처가 남기 때문에 대부분 심한 염증으로 곪기 일쑤였다. 효장세자는 그날 밤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시에 찔린 손가락은 잘 익은 대추마냥 붉게 부어올랐으며 후끈거리는 열감이 느껴졌다.
효장세자는 소위 말하는 생인손에 걸린 것이다. 생인손은 바로 조갑주위염으로 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함부로 떼거나 가시 등에 찔려 상처가 생긴 상태에서 세균이 감염되면서 생기는 화농성, 염증성 질환이다.
의서에는 대지(代指)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손톱이 문드러져 빠지기도 하고, 면역력에 따라서 패혈증이 합병되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다.
효장세자의 손가락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북채처럼 퉁퉁 부어올랐고 가시에 찔린 부위는 마치 삶아 놓은 대두콩 같았다. 벌써 고름이 차는 듯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박동에 맞춰서 욱신욱신거렸다.
하룻밤 자고 나면 좋아질 줄 알고 참았건만, 증상이 날로 심해지자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왕세자를 모시는 내시가 어디서 들었는지, 찹쌀밥을 구해와서 종창부위에 붙어 주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가시에 찔린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어느 날 영조가 효장세자를 불렀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글공부를 잘해 오고 있는지 시험해 보고자 간혹 경연장으로 불러 왔던 것이다. 효장세자는 지금껏 암송했던 사서삼경의 일부를 외우고 질문에 답했다. 영조는 “대견스럽구나”라고 하면서 강론을 담당한 관원에게도 칭찬을 했다.
그러고서는 “그럼 내가 말하는 문구를 써 보거라. 대학에 나오는 문구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하는 것이다. 효장세자는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으로 붓을 잡았다. 그러나 손가락의 통증으로 인해서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나무 목(木) 자의 한 획을 그어 내리다가 눈물을 흘렸다. 7살 어린 나이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나타난 것이다.
영조는 붓글씨 쓰는 것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효장세자를 보고서는 멈칫했다. 곧바로 그것이 퉁퉁 부은 손가락 때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조는 효장세자에게 호통을 쳤다. “왜 그때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하면서 큰소리로 나무랐다.
그러자 효장세자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 육신 손가락 종창의 고통보다 아바마마께서 평소 하시는 소자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더 괴롭기 때문이었사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속으로 ‘너의 효심이 갸륵하구나.’라고 여겼다. 이에 다행스럽게도 왕세자를 모시던 신하들의 문책도 피할 수 있었다.
영조의 부름을 받고 도제조 민진원이 대령했다. 민진원은 의관들과 함께 경연장으로 들어왔다. 민진원은 왕세자의 손가락 상태를 의관들과 함께 살펴보고 고하기를 “송구하게도 왕세자 손가락의 종창(腫脹)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의관들의 말을 들으니 악종(惡腫)이 대단해서 의관들이 조금이라도 만져 보려고 하면 고통스러워하시면서 손도 못 대게 하신다고 합니다. 너무도 놀랍고 걱정됩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그럼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치료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민진원은 “의관들과 논의를 해 보니 첫째, 침으로 곪은 부위를 찔러 농을 빼내는 것이 가장 효과가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세자 저하의 나이가 어려서 두려움과 통증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어 적합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탕을 다려서 먹는 것입니다. 적절한 처방으로는 선방활명음(仙方活命飮)이 있다고 합니다. 선방활명음은 일체의 옹저(癰疽)와 독종(毒腫)에 효과적이며 열독(熱毒)을 푸는데 특효라고 합니다. 그러나 먹어서 치료하는 경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민진원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보다 자신있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세 번째, 바로 생민들레를 으깨서 그 즙을 먹고 찌꺼기를 손가락에 대고 싸매 주는 방법입니다. 민들레는 포공영(蒲公英)이라고 해서 의서에도 대지(代指)에 사용하는 처방이 나와 있으니 지금 바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의관 김필우 또한 일전에 손가락에 상처가 있어 20여 일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민들레를 바르니 바로 효험이 있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영조는 “지금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인데, 생민들레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하고 의아해했다. 그러자 민진원은 “지금도 궁밖에는 가을 민들레가 지천에 깔려 있사옵니다. 가을에도 민들레는 파릇파릇하게 잎을 펼치고 노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솜 같은 씨앗뭉치를 가지고 노는 학동들을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의관들을 내보내 준비를 한다면 저녁 입진 때면 사용이 가능하겠습니다.”
영조는 “민들레가 바로 효과가 있겠는가? 탕보다 빠르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민진원은 “왕세자의 증세가 가볍지 않으니, 우선 오늘 저녁 민들레를 붙이고 며칠 지켜본 뒤라야 효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날 저녁 의관들은 생민들레를 짓찧어 그 즙은 마시게 하고 찌꺼기를 모아서 종창이 생긴 부위에 감싸 놓았다. 저녁 무렵 민들레를 붙이고 난 뒤에 왕세자의 손가락 종창에서는 고름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붓기도 조금씩 가라앉았으며 욱씩거리는 통증도 줄어들었다.
다음 날에는 손가락 종창의 고름이 스며 나오는 것이 확연히 줄었고 그날 밤에는 통증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민들레 처방은 이렇게 해서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3일간 적용했다.
영조는 3일 후 다시 효장세자를 불렀다. “지난번 경연장에서 세자의 손가락에 난 악창(惡瘡)이 매우 심해서 처음에는 내가 차마 눈뜨고 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나아진 다음에야 비로소 보는데도 이렇게 깜짝 놀랄 정도니 어찌 이와 같이 쉽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이는 바로 포공영(蒲公英)의 효과로다. 도제조와 의관들에게도 마땅히 포상을 해야겠지만, 공을 세움의 으뜸은 바로 포공영이니 마치 벼슬의 이름이로다.”라고 하면서 껄껄껄 웃었다.
효장세자는 민들레 처방으로 생인손이 깔끔하게 낫게 되었다. 지천(至賤)의 민들레가 손가락의 종창을 치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만약 민들레가 아니었다면 병약했던 효장세자는 어떤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을런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효장세자는 또다시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 1728년 음력 11월 16일 추운 겨울밤, 안타깝게도 병은 회복되지 않아 밤 11시경에 훙서(薨逝)하였다. 효장세자는 무엇보다 아비에게 끝까지 건강에 대한 걱정만을 끼치고 죽는 것에 대해 불효함을 안타까워했다.
아들을 잃은 영조는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며 탄식하고서는 한참 만에 곡(哭)을 그쳤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효장세자의 곁에는 마른 민들레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 제목의 〇〇〇은 ‘민들레’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승정원일기> 〇 英祖 1年 乙巳(1725年) 9月 27日. 鎭遠曰, 王世子手指傷處, 茫然不知矣。聞醫官之言, 則所傷大段云, 不勝驚慮, 今有向差之漸乎? 上曰, 非望向差, 恐有肆毒之慮耳. (영조 1년 을사년. 1725년 9월 27일. 민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손가락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의관의 말을 들으니 상처가 대단하다고 하니, 너무도 놀랍고 걱정됩니다.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아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독이 기승을 부릴까 우려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〇 閔鎭遠曰, 王世子手指傷處, 極爲可慮矣. 伏聞醫官金弼佑, 曾有手指傷處, 苦痛二十餘日矣, 以蒲公英草, 塗之則卽有效云, 厥草, 覓來試用, 未知, 何如. 上曰, 依爲之。醫官曰, 厥草性味無毒, 女人乳腫, 塗之則有效矣, 可將及用於夕間入診時矣. 吳重卨曰, 手指傷處, 最近掌心, 而外邊則無毒氣, 然傍人欲見之, 則使不得接手, 今日則不然, 其小差, 可知矣, 而第以蒲公草, 塗之似宜矣. 權聖徵曰, 掌心外邊毒氣, 猶未消滅, 誠爲可憫, 而中指本節, 不無差漸, 以蒲公塗之, 則可知有效矣. 閔鎭遠曰, 其症候不輕, 姑觀數日, 然後可知差效矣. (민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손가락 상처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듣건대 의관 김필우가 전에 손가락 상처가 있어 20여 일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민들레를 바르니 바로 효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풀을 찾아서 와 써 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하였다. 의관이 아뢰기를, “그 풀은 성미가 독성이 없어 여인의 유종에 바르면 효과가 있습니다. 저녁 입진 때가 되면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오중설이 아뢰기를, “손가락의 상처 난 데가 손바닥과 가장 가까운데 외변엔 독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옆 사람이 보려고 하면 손도 못 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상처가 조금 나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민들레를 바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권성징이 아뢰기를, “장심 외변의 독기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참으로 걱정됩니다만 중지의 관절에 차도가 없지 않으니, 민들레를 바르면 효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하니, 민진원이 아뢰기를, “그 증세가 가볍지 않으니, 우선 며칠 지켜본 뒤라야 효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9月 29日. 藥房都提調閔鎭遠, 提調申思喆, 副提調柳復明啓曰, 중략. 王世子手指瘡腫, 蒲公草貼付之後, 瘡汁渗出云, 夜間卽有消減之勢, 而痛候亦已止歇乎? 臣等不勝區區憂慮, 敢來問安. 答曰, 중략. 世子手指瘡處腫汁滲出之後, 夜間更不作痛矣. (9월 29일. 약방 도제조 민진원, 제조 신사철, 부제조 유복명이 아뢰기를, “중략.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민들레를 붙이고 난 뒤에 고름이 스며 나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밤사이 바로 증세가 완화되었고 통증도 그쳤습니까? 신들은 구구한 우려를 금할 수 없어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 “중략.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름이 스며 나온 뒤로 밤사이 다시 통증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壬戌. 夜三更一點, 王世子薨逝于昌慶宮之進修堂. 是日, 再行祈禱于宗廟社稷, 夜, 疾益㞃, 亥時薨. 上對領議政李光佐、兵曹判書趙文命等, 哭之慟曰: “將奈宗廟、社稷何?” 良久哭已. (임술년. 영조 4년 1728년 11월 16일. 밤 3경 1점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홍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 판서 조문명 등을 대하여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본초강목> 蒲公英. 甘, 平, 無毒. 婦人乳癰水, 腫煮汁飮及封之, 立消. 解食毒, 散滯氣, 化熱毒, 消惡腫, 結核, 丁腫. 摻牙, 烏鬚髮, 壯筋骨. 白汁, 塗惡刺, 狐尿刺瘡, 卽愈. (포공영. 맛은 달고 성질은 평하고 독이 없다. 부인의 유종에는 물에 달여 낸 즙을 마시고 달여 낸 찌꺼기를 붙이면 즉시 사그라든다. 음식의 독을 풀어주고 막힌 기를 흩어 내며 열독을 변화시키고, 악성 종기, 멍울, 정종을 삭인다. 이를 닦거나 머리를 검게 하며, 근골을 튼튼하게 한다. 흰 즙은 가시가 박혔거나 호뇨자창에 바르면 즉시 낫는다.)
<동의보감> 代指者, 指頭先腫, 焮熱掣痛, 然後於爪甲邊結膿潰破, 甚者, 爪甲俱脫. 代指, 亦謂之天蛇頭瘡. 治代指, 蒲公英, 與蒼耳草等分爲末, 好醋濃煎, 浸洗卽愈. 蒲公英擣細, 水和去滓服之, 滓𨠭患處, 累效. 手足觸木惡刺, 及狐尿刺腫痛, 蒲公英摘取白汁, 多塗, 立差. (대지는 손가락 끝이 먼저 붓고 화끈거리며, 당기면서 아프다가 손톱 주위가 곪았다가 터지는 것이다. 심하면 손톱이 모두 빠진다. 대지를 천사두창이라고도 한다. 대지를 치료하려면 포공영과 도꼬마리를 같은 양으로 가루내어 좋은 식초에 진하게 달이고, 여기에 담그고 씻는다. 그러면 낫는다.
포공영을 곱게 찧어 물에 타서 찌꺼기를 걸러낸 뒤 마시고, 찌꺼기는 아픈 곳에 덮는다. 자주 효과를 보았다. 손발이 나무에 닿아 생긴 악자나 호뇨자로 붓고 아플 경우 포공영을 따서 흰 즙을 내어 많이 바르면 곧 낫는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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