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요리사'로 불렸던 예브게니 프리고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전과자 출신으로 요식업 통해 신흥재벌로 성장
푸틴의 기존 측근들과 권력 다툼 끝에 반란 시도
망명 이후에도 평소처럼 지냈지만 의문사
지난 2011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예브게니 프리고진(왼쪽)이 당시 러시아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AP뉴시스
[파이낸셜뉴스] 전과자 출신의 소시지 상인에서 러시아 최대 용병조직 수장으로 성장했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3일(이하 현지시간) 원인 모를 전용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가 자신에게 권력을 쥐여 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지 약 2개월 만이다.
소년원 들락거리다 푸틴 요리사로
러시아 독립매체 메두자 등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196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향년 62세로 어린 시절에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를 꿈꿨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절도 등으로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20세에는 조직범죄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약 9년간 옥살이를 했다.
프리고진은 석방 이후 양아버지와 함께 고향에서 소시지 가판을 열었고 장사가 잘 되자 식료품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는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부유층을 겨냥한 고급 식당 사업을 시작했다.
프리고진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에서 일하던 푸틴을 손님으로 만나 친분을 쌓았다.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푸틴은 외국 귀빈이 방문하면 프리고진의 식당에서 접대를 했다. 2001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 2002년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프리고진의 식당을 방문했다. 프리고진은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푸틴 위세 업고 신흥 재벌로
그는 푸틴의 위세를 업고 학교 및 군부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동시에 정부 조달 사업을 쓸어 담으면서 신흥 재벌(올리가르히)로 거듭났다. 그는 푸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 하기 힘든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했다. 처음에는 가짜뉴스와 인터넷 선동이었다. 프리고진은 우크라이나에서 지난 2004년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각종 미디어에 대규모 로비를 감행했다. 그는 러시아를 반대하는 시위대에 악의적인 보도를 내보냈으며 이후 직접 가짜뉴스를 찍어내는 업체들을 세웠다. 프리고진이 세운 패트리어트미디어그룹은 2016년 미 대선 당시 대규모 가짜뉴스와 선동 메시지를 온라인에 퍼뜨려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러시아 민간 군사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왼쪽)이 지난 3월 3일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우크라 정부를 향해 바흐무트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AP뉴시스
바그너그룹 설립, 러시아 대신 활동
프리고진은 푸틴이 우크라를 본격적으로 집어삼킬 야욕을 보이자 2013년에 민간군사업체 바그너그룹을 세워 이를 도왔다. 바그너 용병들은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 크림반도를 불법 합병할 당시 현지에서 러시아군을 대신해 활동했다. 프리고진은 이후 아프리카와 중동의 친러 독재 정권에 경호 및 군사 훈련, 치안 유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현지 광산 채굴권 등 각종 이권을 가져왔다.
그는 러시아가 지난해 우크라를 침공하자 즉시 바그너 용병들을 투입했다. 서방 언론들은 프리고진이 우크라에서 공을 세워 중앙 정계에 진출할 계획이었다고 분석했다. 바그너 용병들은 우크라 동부전선에서 우수한 성과를 냈지만 러시아 정규군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군 지휘부가 바그너 용병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탄약 등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 장관 등 러시아 군 최고 권력자들은 푸틴이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 일할 당시부터 푸틴과 함께한 최측근이다. 이들은 일개 신흥재벌인 프리고진이 우크라 전장에서 자신들과 전공을 다투자 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6월 반란, 모스크바로 진군
프리고진과 군 지휘부의 권력 다툼은 올해 초 바흐무트 전투에서 폭발했다. 러시아군은 바그너 용병들에게 우크라에서 싸우려면 프리고진이 아닌 군과 직접 계약하라고 요구했다. 직원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프리고진은 우크라 인근 지휘부를 급습해 쇼이구 등 군 지휘부를 생포하여 계약 조치를 취소하게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들켰다. 그는 군 지휘부가 모스크바로 도망가자 6월 23일 직원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푸틴은 반란 직후 프리고진이 아닌 군부의 편에 섰다. 그는 프리고진을 즉각 “반역자”로 선포했으며 이에 프리고진은 36시간 만에 반란을 중단하고 벨라루스로 망명했다.
러시아 민간 군사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오른쪽)이 지난 6월 24일(현지시간) 벨라루스 망명에 앞서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주 로스토프나도누를 떠나기 전에 지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AP뉴시스
서방 언론들은 푸틴이 프리고진을 수감하거나 처형할 경우 다른 신흥 재벌들의 불만을 살 수 있다고 분석했다. 프리고진은 6월 29일에도 모스크바에 돌아와 푸틴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와 벨라루스 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7월 말에도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나 마치 반란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푸틴이 순순히 프리고진의 반란을 눈감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푸틴은 지난 6월 발표에서 프리고진의 사업체가 정부 조달 사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비난했으며 바그너그룹의 해외 이권 역시 회수하기 시작했다.
미 CNN은 지난달 2일 보도에서 우크라 국방부 국방정보국의 키릴로 부다노우 국장을 인용해 푸틴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프리고진 제거를 지시했다고 전했다. 부다노우는 "프리고진을 제거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망명을 중재했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도 6월 인터뷰에서 푸틴이 프리고진 제거를 명령했으나 자신이 말렸다고 주장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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