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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첫 국산 금성라디오

[기업과 옛 신문광고] 첫 국산 금성라디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는 1958년 부산 연지동에서 출범했다. LG그룹 창업주이며 당시 락희화학 사장이던 구인회가 사장을 겸했다. 전자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때라 전자제품 기업을 차린 것은 모험이었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던 락희화학이 있었기에 제품의 틀만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순 우리 기술로 만든 첫 작품이 1959년 11월 15일 탄생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A-501'이다(동아일보 1959년 12월 16일자에 실린 광고·사진). 어느 지방신문은 이렇게 썼다. '금성사가 전국 상점에 일제히 라디오를 공급하였다. 금성사는 약 200명의 종업원이 현대적 시설로 된 공장에서 한 달에 3000대를 만들 수 있다. 라디오는 탁상용이며 케이스는 플라스틱으로 5가지 색상을 출시하였다.'

최초의 금성 라디오는 대여섯 대가 남아 있는데 한 대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라디오는 당시 36세의 젊은 엔지니어 김해수가 설계했다. 김해수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장인이라고 한다. 어렵사리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라디오는 사치품 취급을 받아 보급률이 매우 낮았다. 라디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더 비싼 외국산을 선호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많았고 방송 내용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판매가 되지 않아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밀수품 근절 포고령을 내리면서 판매량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구인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찾아가 금성 라디오 5000대를 기증하면서 라디오를 국민 홍보에 이용하라고 권했다. 그 말대로 박정희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펼쳤고 하나뿐인 국산 제품인 금성 라디오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허술해 보이던 첫 라디오를 출시한 지 3년 만인 1962년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할 만큼 국산 라디오의 품질은 좋아졌다. 라디오의 대성공으로 금성사는 가전업체의 선두주자로 성큼 나서 승승장구했다. 선풍기(1960), 냉장고(1965), 흑백 TV(1966), 창문형 룸에어컨(1968), 세탁기(1969), 컬러TV(1977) 등에 붙은 최초라는 수식어는 모두 금성사 차지였다. 사세가 커진 금성사는 1967년 본사를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로 진출했다. 사업 구조도 가전, 통신, 전선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71년에 락희화학에서 옮긴 4대 사장 박승찬(1926~1979)은 '금성 약진 3개년 계획'을 내걸고 기술 개발에 몰두하고 금성사를 크게 키웠다.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경북 구미와 경남 창원에 공장을 세웠다. 금성사는 1995년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그룹명과 로고를 변경함에 따라 LG전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