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이 만난 솔깃한 story
세계 일류상품 셋 중 하나, 중견기업 자부심
글로벌 1위 기술로 유니콘 넘어선 곳도 즐비
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이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중견련에서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앞으로 중견기업 육성을 위해선 공공과 민간의 팀워크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중간은 늘 어렵다. 위치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실체적 진실 논란에도 선거 방정식 중 흔한 분류로 진보와 보수가 있다. 그 중간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다. 대략 비율은 30% 안팎이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선거철만 되면 양쪽에서 서로 포섭하려고 난리다. 산업에도 중간이 있다. 예전엔 작거나(영세·중소기업) 아니면 아예 크거나(대기업) 둘 중 하나였다. 기존 정부 정책은 중소기업은 보호나 지원의 대상, 대기업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중간이 바로 중견기업이다. 덩치는 중기보다 크지만 더 키우려면 지원도 해야하고, 대기업보단 작지만 아직 대기업은 아니니 적당히 규제도 받아야했다. 어중간한 위치다보니 겪는 설움이 많다. 하지만 산업자원통상부가 선정한 세계 일류상품의 3분의 1이상이 중견기업 제품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하게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즐비하다.
이호준 한국 중견기업연합회(이하 중견련) 상근부회장은 산업부 출신이다. 30년 공직생활을 한 행정의 베테랑이다. 이 부회장이 1년 전 민간 경제단체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당시 처음 한 일이 공직의 무겁고 두꺼운 '갑옷'을 내려놓는 거였다. 현역시절, 왠만한 자리에선 늘 중심이었던 그에겐 결코 쉽지 않은 '힘빼기'였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2모작 3대 키워드는 '현장'·'겸손'·'소통'이었다. 그에게 현장은 중견기업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보여주는 생동감 그 자체였다. 거의 모든 행사의 가장자리에서 대화를 주도하기보단, 경청에 집중했다. 기업인, 공무원, 직원들과 늘 대화하면서 개선점을 찾았다. 최근에는 산업부와 중견련의 젊은이간 격의없는 토론 모임인 '산중호걸'도 만들었다. 이 부회장은 중견기업을 "최고의 기술력과 전통을 가진 기업"으로 정의한다. 그는 주요 성과로 지난 3월 중견기업특별법이 한시법의 '꼬리표'를 떼고 상시법으로 전환된 것을 꼽았다. 그는 여전히 배고프다. 이 부회장은 "공공과 민간의 팀워크를 강화하고, 초기 중견기업을 넘어 성장 단계별 맞춤형 지원이 가능한 중견기업 정책 2막의 시대를 열기 위해 신발끈을 조여맬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간 패권다툼속 '민간협의체' 활성화 시급
이 부회장은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중견련에서 파이낸셜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성공한 기업의 숙명으로 '남이 하지 않은 창조적 혁신'을 강조했다. 이는 '남과 다른 나'를 추구하는 유대인의 경제교육 방식인 '티쿤 올람'(Tikun Olam)과 맞닿아 있다. 뜻은 '세상을 바꾸다'이다.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다른 기업이 흉내내지 못하는 최첨단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우리는 일본의 수출 규제상황에서 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한 솔브레인과 포토레지스트 국산화에 도전한 동진쎄미켐 등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여러 중견기업의 성공사례가 있다"고 소개했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정액이며 포토레지스트도 반도체 핵심 소재로 일본으로부터 90%이상 수입한다. 일본이 공급을 끊으면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도 공장을 멈출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중간 글로벌 공급망 패권다툼에서 중견기업의 위기감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중견련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중견기업 수출지역 상위 3개국은 중국(51.1%), 미국(42.3%), 일본(31.8%)이다. 이 부회장은 "단기적으로는 정부와 민간기업이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 예상되는 공급망 문제를 신속하게 공유하고, 해결방안 수립을 위한 '민관협의체' 활성화가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수입의존도 높은 원자재 대체기술 개발 관건
장기적으로는 특정 국가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은 원재료나 원자재를 대체할 수 있는 자체기술 개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중견기업에 대한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이 전폭적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비상장 기업) 중견기업의 성장 잠재력이 높다는 점이다. 그는 "오랜 업력을 통해 세계 1위 기술력을 가진 대부분의 중견기업의 가치는 유니콘 기준을 이미 넘어섰다"며 주성엔지니어링(반도체), 한국콜마(화장품), 고영테크놀러지(정밀 광학기기), 미원상사(화학), 신성이엔지(전기장비) 등을 예로 들었다. 이 부회장은 "이들은 물론 혁신 스타트업, 벤처기업들을 유니콘으로, 나아가 글로벌 선도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지에 따라 우리 경제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견련이 지난 2020년부터 산업부와 함께 운영중인 '중견기업-스타트업 상생 라운지'는 중견기업계에 축적된 기술력과 전통을 스타트업의 톡톡튀는 아이디어와 접목시키는 장(場)이다. 실제로 상생 라운지 틀 안에서 많은 스타트업 청년들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해당 중견기업과의 효과적인 협력을 적극 모색중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부회장은 "기업활력법에 명시된 세제, 자금, 연구개발 등 다양한 지원을 지속 확대하는 한편, 업종을 넘나드는 사업 재편을 유연하게 허용하고 중견기업과 스타트업 협력에서 발생하는 투자와 분할, 합병 등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견기업특별법 상시법 전환… 추가 개정 사활
그는 주요 성과로 역대 최초로 대통령이 참석한 지난해 11월 '중견기업인의 날' 기념식과 올해 3월 '중견기업특별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된 점을 꼽았다. 이로써 중견기업 육성·발전을 위한 안정적인 법적·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이 나온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좀 더 명확한 지원 규정을 담은 추가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복안이다. 이 부회장은 "특별법 일부 내용은 다소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실질적이고 폭넓은 지원 근거로 활용되기 위해선 추가적인 개정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했다. 우선 중앙부처는 물론 지자체의 중견기업 체계를 명확히 하고, 여타 법령의 인용수준을 '당연한' 정도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중견기업 금융지원 확대, 산업·통상 환경변화에 따른 공급망 재편, 탄소중립 대응 및 디지털 전환 지원, 지방 중견기업 육성, 중견기업 특혜 확대 등을 핵심 추진 과제로 설정했다.
하지만 중견기업특별법의 상시법 전환에도 불구, 여전한 거미줄 규제가 중견기업 육성에는 걸림돌이라는 판단이다. 기술력 등에서 글로벌 역량을 확보한 중견기업이 공장을 짓지 못해 투자를 포기해 기업, 나아가 국제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 부회장은 "수도권 공장총량제, 수도권내 공장 신증설 제한 등 입지규제의 경직성은 반드시 해소돼야 한다"며 "수도권 공장 신증설이 가능한 중소기업과 달리 중견기업은 첨단업종 등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며 수도권 입지를 제한하는 '산업집적 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의 조속한 개정을 촉구했다. 또 대표적 전통규제인 환경규제의 경우 기업이 한쪽 사업장에서 발생한 배출허용총량 여유분을 총량이 부족한 다른 쪽 사업장에 이전할 수 있도록 권역간 배출권 이전을 제한한 '대기관리권역법'의 개선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최근 최진식 중견련 회장이 소매금융 중심의 금융관행을 비판하면서 정책자금의 문턱이 유독 중견기업에 대해 높은 점을 문제삼았다. 올 3월 중견련이 조사한 결과, 정책자금 활용 경험이 있는 중견기업은 10.1%에 불과할 만큼 진입장벽이 높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시중은행에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비싼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 부회장은 "'투자와 성장의 순환'이라는 중견기업 특성상 상대적으로 낮은 신용도 탓에 그조차도 원활히 수급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당장 투자할 곳은 많은데 한시적으로 부채가 늘었다고 금융권에서 고금리와 추가담보를 요구하거나 대출을 회수하면 공장을 멈추는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특히 현재 금융권에는 중견기업 특성을 반영한 전용 평가모델 자체가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대안으로 중견기업의 경제적 위상과 기여도, 성장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중견기업 전용 금융정책'을 강화할 것을 제언했다. 세부적인 방법론으로 ▲중견기업 전용 평가모델 개발·도입 ▲신용등급, 여신한도, 적정 금리, 담보 인정범위 확대 ▲300억이상 중견기업 전용 신용보증제도 신설 등을 내놨다.
■30년 공직생활 토대로 현장·겸손·소통 주력
이 부회장은 3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8월 취임후 줄곧 현장에서 낮은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공직자의 두꺼운 갑옷을 벗는, '힘빼기'에 주력했다. 행정의 달인에서 민간 신입사원으로서 현장·겸손·소통을 늘 가슴에 새겼다. 그는 "민간으로 나오면서 저는 항상 끝에 섰고 최대한 많이 들었다"며 "(공직자로서) 힘빼는 시간이 필요했죠. 힘을 뺀 자리엔 지난 1년간 수많은 창업주들과의 만남과 치열한 기업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채워넣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사석에서 만날 때도 늘 한결같다. 세련된 매너와 상대방을 유쾌하게 만드는 위트까지 갖췄다. 결코 서두르는 법은 없지만, 늘 한 발짝 앞서 갔다. 그는 "공무원 30년 세월에도 중견기업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죠. 숫자로 구성된 정책보고서에 매몰된 건 아니었는 지, 반성하는 일 년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경기침체 터널을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선 공공과 민간의 팀워크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산업부와 중견련의 젊은이들이 격의없이 토론하고 업무협의를 할 수 있도록 '산중호걸'이라는 모임까지 만들었다. 산업부의 '산'과 중견련의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공공과 민간부문간 역지사지(易地思之·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개선점을 찾겠다는 의도다. 이 부회장은 끝으로 기업 스스로가 늘 '우리 기업은, 우리 제품은, 우리 서비스는 무엇이 다른 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한국 1등, 글로벌 1등 기업이 탄생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 이호준 중견련 상근부회장 약력
▲1967년생 ▲서울 보성고 ▲서울대 경제학과.동 대학원 정책학과(석사) ▲영국 맨체스터대 기술정책학 박사 ▲행정고시(34회)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정책과장 ▲대통령비서실 산업통상자원비서관실 선임행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정책기획관.통상협력국장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비서실 산업정책비서관
haeneni@fnnews.com 정인홍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