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한자는 가을 추(秋) 저녁 석(夕)이다. 뜻만 놓고 직역하면 '가을 저녁'이다. 진짜 저녁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가을의 끝자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가을의 끝은 농경사회에서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시기다. 농작물을 수확하기 때문이다. 한 해 중 가장 풍요롭고, 잠깐이나마 끼니 걱정에서 해방되는 행복한 날이기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자리 잡은 게 추석이다. '보릿고개'가 사라진 현대 한국 사회는 사실 먹고살 걱정 하던 시절은 지났다고 봐야 한다. 쌀이 남아돈다고 하고, 먹는 것은 생존 수단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건 모두 착시다. 우리는 분명 식량의 풍부함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은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왜곡이다. 2023년 현재 한국은 명백한 식량위기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라는 세계 정치·경제 분석기관이 매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순위라는 걸 발표하는데, 2022년 한국의 순위는 39등이다. 전체 조사 대상이 113개국이니까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체 국토면적이 서울이랑 비슷한 싱가포르가 28위로 우리보다 높은 데다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 같은 중동 국가도 30위, 23위로 한국의 위에 있다.
우리는 분명히 먹거리 걱정을 안 하고 사는데, 왜 순위가 이럴까. 농림축산식품부가 집계한 2021년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20.9%다. 한 해 동안 우리가 소비하는 곡물의 80%를 우리가 생산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식량자급률도 2021년 44.4%로 절반에 못 미친다. 지난 1970년의 86.2%와 비교하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좀 모자라면 어떠냐, 돈 많은데 사다 먹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런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유럽의 식량 창고인 우크라이나가 봉쇄되자 밀 가격이 폭등하는 등 하루아침에 식량위기가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도 언제든 이런 위협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환경이 여러모로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는 일본의 지난해 GFSI 순위는 무려 8위다. 수년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식량안보 강국이다. 일본은 이미 1970년대부터 안정적인 식량 공급망 확보에 열을 올렸다. 국가 지원을 등에 업은 공기업이 해외 농업국가에 기술과 설비 투자를 하고, 대신 농산물 생산기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식량 안보에 대비해 왔다.
식량 안보 강화를 위해서는 쌀에 치중돼 있는 경작 환경을 바꾸는 게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도 밀·콩·옥수수 재배를 늘리기 위해 농가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지원 행정을 펴고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제 한국도 장기적인 안목의 식량정책이 있어야 할 때다.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해외 곡물기지 확보를 늘려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폭적인 외교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식량은 이제 안보의 문제다. 경제적 풍요가 주는 착시에 빠져있다가는 오랫동안 사라졌던 보릿고개가 21세기 한국에 재현될지도 모른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경제부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