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본초강목>에는 성충의 실명한 노모가 굼벵이를 먹고서 눈을 떴다는 이야기와 함께 제조(蠐螬, 굼벵이)의 그림이 나온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3대 군주로 손휴(孫休)가 즉위를 했다. 손휴에게는 일찍이 스승이 있었는데, 바로 성충(盛冲)이었다. 성충은 손휴가 즉위하자 곧바로 박사(博士)로 임명되었고, 손휴는 성충과 함께 독서와 강독을 즐겼다. 이후 성충은 중서랑(中書郎)이라는 관직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성충에게는 왕씨(王氏) 성을 가진 노모가 있었다. 노모는 1년 전쯤에 심한 배탈이 난 이후로 식욕이 없어 거의 먹지를 못했다. 고작 먹는 것은 흰쌀밥이나 쌀죽에 간장 한 종지뿐이었다. 성충은 높은 관직에 있어서 집안의 살림은 넉넉했고 항상 좋은 음식을 어머니 밥상에 올려 드렸지만 왕씨는 도무지 먹지를 못했다.
어느 날 밤, 계집종이 잠자리를 봐 드리려고 방안에 들어왔는데, “누가 왔는가? 자네는 누군가?”라고 하는 것이다.
계집종이 황급히 호롱불 몇 개를 더 밝혔는데도 왕씨는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지 못했다. 야맹증이 생긴 것이다. 왕씨는 낮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보였지만 밤만 되면 달이 휘영청 떠서 마당이 환함에도 불구하고 돌부리나 사물을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밤이면 잘 넘어지고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한 달포 정도 지나자 왕씨는 이제 낮에도 점차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결국 밝은 대낮에도 눈이 어두워져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청맹(靑盲)이 된 것이다. 청맹은 눈이 겉보기에는 멀쩡하면서도 점점 보이지 않아 나중에는 실명하게 되는 병증을 말한다.
하인들은 “아들이 중서랑이면 뭐하나. 어미는 청맹과니가 되셨네.”라고 놀리는 듯하면서도 안쓰러워했다.
성충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실명이 단지 노환(老患)으로만 생각했다. 성충은 바쁜 관직 일로 인해서 며칠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 계집종에게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릴 것을 당부하고 집을 나섰다.
당시는 늦가을이었다. 집안의 하인들이 대궐 집에 있는 초가집들의 지붕을 새로 얹는 작업을 했다. 초가지붕을 새로 얹는 것은 오래된 짚을 내리고 새로운 짚으로 올려야 비와 눈을 막아주기 때문에 가을이면 한번씩 작업을 해 왔다.
초가집 지붕의 볏짚을 새로 얹는 날이면 굼벵이 잔칫날이었다. 지붕의 푸석거리는 볏짚을 내려 펼치자 그 안에는 많은 굼벵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굼벵이는 좋은 간식거리였다. 굼벵이는 구워 먹거나 쪄서 먹으면 맛이 좋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모유가 안 나오는 산모에게 먹이면 젖도 잘 나왔다. 굼벵이는 말려서 약으로도 사용했기에 인근 양방의 의원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벌써 와 있었다.
왕씨를 모시는 계집종도 항아리 가득 굼벵이를 얻어 담았다. 작은 항아리에 굼벵이가 금세 가득찼다. 항아리 안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굼벵이들이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항아리 속의 굼벵이들이 뒤엉켜 꿈틀거릴 때는 신기하게도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났다.
계집종은 굼벵이를 익혀 먹고자 마당 한 켠에서 작은 옹기에 굼벵이들을 넣고 향유(香油,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려서 익혔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그때 마침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 왕씨가 “이 맛있는 냄새는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계집종은 차마 굼벵이라고 말을 못하고 “마님, 초가집 볏짚 속에 사는 작은 고기입니다.”라고 했다.
왕씨는 평소 식욕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익어가는 굼벵이의 향에 식욕이 돋았다. 그래서 한입 먹어보았는데, 부드럽고 맛도 좋았다. 속도 편하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았다. 계집종은 자신도 먹고 싶었지만 왕씨가 맛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을 눈치채고 미안했던 왕씨는 “네가 먹으려고 했던 작은 고기를 내가 먹게 생겼으니, 대신 아들이 보내 주는 좋은 육고기를 먹게 해 주마.”라고 했다. 계집종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계집종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왕씨에게 정성스럽게 굼벵이를 익혀줬다. 열흘 정도 지났다. 그날도 왕씨는 마루에서 향유를 넣어 익힌 굼벵이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때마침 성충이 집을 비운 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성충이 마당을 지나 거의 마루의 디딤돌까지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노모는 아들이 왔는지를 알지 못했다.
성충은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 드시고 계십니까? 어머니가 모처럼 이렇게 잘 드시니 제가 마음이 흡족합니다. 제가 드시는 것을 거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받아들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굼벵이들이 가득했다.
성충은 깜짝 놀라며 “어머니, 제가 불효를 했습니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돌보지 못하니 눈이 멀고 이제는 이런 하찮은 미물(微物)까지 드시다니요.”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한참을 통곡했다.
성충은 거의 한 식경(食頃) 동안 소리 내 울었다. 왕씨의 윗옷이 성충이 흐른 눈물에 젖어 어둡게 물들어갔다. 마당에는 계집종은 고개를 떨군 채 벌벌 떨며 양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자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계집종은 자신이 왕씨에게 굼벵이를 먹게 해서 성충이 화가 난 것으로 생각했다. 성충의 통곡하는 울음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몰려왔다. 하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왕씨가 “보인다. 이제 보이는구나. 하인들은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이냐? 네 얼굴을 보니 전에 비해 많이 상했구나.”라고 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눈이 멀었던 왕씨가 다시 보인다니 말이다. 모두들 성충의 효성이 지극해서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성충은 깜짝 놀라서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자초지종을 듣고 진찰을 마치고 나서는 “보아하니 어머니는 잘 드시지 못해서 청맹(靑盲)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도 보지 못하고 결국 낮에도 눈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눈이 밝아지신 것은 바로 계집종이 삶아 준 굼벵이 때문입니다.”라고 설명을 했다.
의원은 이어서 “의서에 보면 굼벵이는 제조(蠐螬)라고 했는데, 눈 속에 살이 자라나는 것과 청예(靑瞖), 백막(白膜)에 주로 쓴다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청예(靑瞖)란 눈 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증상을 말하며, 백막(白膜)이란 눈에 하얀 꺼풀이 생기는 병증으로 요즘으로 보면 백내장을 의미한다. 굼벵이가 다양한 눈병에 좋다는 말이었다.
성충은 놀라면서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굼벵이가 눈을 뜨게 하다니요?”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의원은 “고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선비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귀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우물가에 굼벵이가 반이 넘게 파먹은 오얏나무 열매가 있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서 그것을 주워 먹은 뒤 세 번 목구멍으로 삼키고 나자, 그때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선비는 오얏 때문이 아니라 바로 굼벵이를 먹어서 좋아진 것입니다. 아마도 오얏(자두)과 함께 배불리 먹은 굼벵이가 간의 기운을 길러 눈을 밝게 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성충은 다시 “잘 먹지를 못해도 눈이 멀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최근 전혀 드시지를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의원은 차분하게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골고루 잘 먹어야 합니다. 노인이 되어서 먹지를 못하면 자칫 실명합니다. 눈은 밝은 기운과 관련이 있으니 색이 노랗고 붉은색을 띠는 화려한 빛깔의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하고, 간간이 육고기나 조류의 알도 먹어야 합니다. 특히 못 먹어서 생긴 청맹에는 동물의 간이 특효합니다. 이제 어머니는 눈이 보이니 굼벵이인 것을 알고 나면 징그럽다고 안 드시려고 할 수 있으니 그때는 신선한 소나 양의 생간을 기름장에 찍어 드시게 하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성충은 계집종에 상을 내리고 어머니에게는 어떻게든지 음식을 골고루 드실 수 있도록 했다. 성충의 이야기는 후세에 ‘성충의 효심이 노모의 눈을 뜨게 했네.’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왕씨의 실명은 계집종이 삶아준 굼벵이를 통해서 영양분을 충분하게 섭취해서 회복된 것이다. 시력에 필수적인 영양성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비타민 A인 레티놀이다. 레티놀이 부족하면 야맹증이 나타나고 심하면 실명하게 된다. 굼벵이에는 레티놀이 풍부했다.
레티놀은 굼벵이 이외에도 가자미, 동물의 간, 달걀노른자에도 많고, 카로틴 형태로 당근, 시금치, 호박, 고구마 등과 녹황색 채소에도 많다. 비타민 A(레티놀)는 지용성이기 때문에 기름을 넣고 조리하면 더욱 좋다.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만으로도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 제목의 ○○○는 ‘굼벵이’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본초강목> 按陳氏經驗方云, 晉書吳中書郎盛沖母王氏失明. 婢取蠐螬蒸熟與食, 王以爲美. 沖還知之, 抱母慟哭, 母目卽開. 與本草, 治目中靑翳白膜, 藥性論, 汁滴目中去翳障之說相合. 予嘗以此治人得驗, 因錄以傳人. (진씨경험방에서는 ‘진서에 오나라의 중서랑인 성충의 어미 왕씨가 실명하였다. 계집종이 굼벵이를 잡아서 쪄 익혀 먹였는데, 왕씨는 그것을 맛있다고 하였다. 성충이 돌아와 그 일을 알아차리고는 어미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자, 어미의 눈이 곧바로 뜨였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본초서에서 ‘눈 속의 푸른 예막과 백막을 치료한다.’는 것과 약성론에서 ‘즙을 내어 눈에 점안해 주면 예장을 제거한다.’라고 한 설과 서로 부합한다. 내가 일찍이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하여 효험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기록하여 남들에게 전한다.)
<맹자> 滕文公下. 匡章曰, 陳仲子豈不誠廉士哉. 居於陵, 三日不食, 耳無聞, 目無見也. 井上有李, 螬食實者過半矣. 匍匐往將食之, 三咽然後, 耳有聞, 目有見. (등문공하. 광장이 말하기를 “진중자는 어찌 참으로 청렴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오릉에 살 적에는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귀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우물가에 굼벵이가 반이 넘게 파먹은 오얏나무 열매가 있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서 그것을 주워 먹은 뒤 세 번 목구멍으로 삼키고 나자, 그때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동의보감> ○ 靑盲者, 瞳子黑白分明, 直物而不見者也. (청맹이란 눈동자의 흑백은 분명하나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 蠐螬. 主目中淫膚, 靑瞖白膜, 又去瞖障, 療靑盲. 取汁滴目中, 又焙乾作末服. 盛彦母, 食之眼復明. 雖是孝感, 亦物性宜然. (굼벵이. 눈 속에 살이 자라나는 것과 청예, 백막에 주로 쓴다. 또, 예장을 없애고 청맹을 치료한다. 즙을 내어 눈 속에 떨어뜨리거나, 불에 쬐어 말려서 가루내어 먹는다. 성언의 어머니가 이것을 먹고 눈이 다시 밝아졌다고 한다. 비록 효심이 통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또한 약성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 牛肝. 明目. 作膾食之, 煮食亦可. 小兒雀目生食之. (눈을 밝게 한다. 회로 먹는 데, 삶아 먹어도 좋다.
소아의 야맹증에는 날로 먹는다.)
○ 靑羊肝. 主靑盲, 能明目, 去昏暗. 目赤暗痛, 羊肝薄切, 以五味和食之, 神效. (청맹에 주로 쓰고, 눈을 밝게 하며 눈이 흐린 것을 없앤다. 눈에 핏발이 서고 어두우며 아픈 데는 양의 간을 얇게 썰어 양념하여 먹으면 신효하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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