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신항로 개척과 대항해 시대, 그리고 산업혁명은 왜 유럽에서 일어났을까. 많은 이들은 '결핍'에서 찾는다. 중국은 자체 생산력과 소비시장만으로 충분히 풍족했다.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있던 이슬람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 간 중계 무역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이에 반해 유럽은 생산력은커녕 소비시장도, 무역로도 없었다. 대서양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도, 서쪽 항로가 얼마나 길지 몰라도 '이렇게 고립돼 죽을 바엔 나가보자'라는 심정으로 유럽인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가상자산 시장도 비슷하다. 전문가들을 만나보면 "통화(원화)와 금융시장이 안정적인 한국과 같은 선진국은 당장 가상자산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금융 선진국에게 가상자산은 안정성을 해치는 위험 분자로 느껴질 뿐이다.
최근 2~3년 가상자산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나라들은 대부분 자국의 화폐 가치가 바닥에 떨어졌거나 금융시장이 불안정한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나이리지라, 튀르키예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화폐 가치 하락 때문에 가상자산 활용이 늘어났다. 브라질도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가운데 내년 기준금리 인하가 예상되면서 비트코인 거래량이 급등했다. 베네수엘라는 독재정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상자산 이용이 급증했다.
지난 2021년 엘살바도르, 2022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각각 비트코인을 자국의 화폐로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제3, 제4의 엘살바도르가 나올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이런 흐름에 바이낸스, 코인베이스 등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브라질 등 신흥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전 세계 국부펀드 가운데 일부는 이미 수년 전부터 비트코인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코인 수탁 자회사 코인베이스 커스터디는 국부펀드도 자사에 가상자산을 수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규제 일변도였던 일본, 싱가포르, 영국 등 주요 국가들도 가상자산 산업 육성 정책을 뒤늦게 추진하고 있다. 장기간 가상자산에 부정적이었던 중국도 홍콩을 통해 가상자산에 친화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모습이다.
당장 우리가 쓰지 않는다고, 모두가 쓰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고,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금융시장이 이렇게 망할 바엔 가상자산이라도 써보자'는 심정으로 신흥국들은 '크립토 콜럼버스'가 되고 있다.
주요 국가들도 이미 시작된 '크립토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서둘러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있다. "가치도 없는 데이터를 사고 파는 도박판"이라고 비판만 하지 말고, 전 세계 국가들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지를 봐야 한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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