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내진설계기준 생겼지만
규제 사각지대 놓인 노후건물 위험
기둥에 하중 집중된 ‘필로티 건물’
전국 도시형 생활주택 88% 차지
인구밀도도 높아 ‘지진 시한폭탄'
내진설계 건축물 인증을 받은 서울 소재 구립도서관 앞에 인증패가 부착돼 있다. 뉴스1
우리나라는 1999년 이후에 규모 2.0 이상의 지진은 연평균 70.6회 발생했고, 규모 3.0 이상 지진은 연평균 10.5회 발생했다. 2016년 경주 지진과 2017년 포항지진 이후 지진 발생이 급증했다.
14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9~2021)에는 월 6.0~7.3회 지진이 발생했고 2022년 11월 기준으로 총 71회의 지진이 발생해 월평균 6.5회를 기록했다. 경주와 포항지진 이후 점차적으로 지진 발생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2022년 충북 괴산에서 규모 4.1 지진이 발생함에 따라 한반도가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공공 및 민간 신축건축물의 내진설계가 중요해졌다.
서울시는 공공시설물 내진율을 오는 2030년까지 100%로 높일 예정이다. 올해 1월 기준 서울시 내 공공시설물의 내진율은 95.4%다. 내진율이 20.2%에 그친 서울 소재 민간건축물에 대해서는 건폐율·용적률 완화 등 인센티브를 제공해 참여를 유도할 예정이다.
■노후 민간건축물 지진에 속수무책
내진설계가 얼마나 잘 갖춰졌는지에 따라 피해 규모도 달랐다. 지난 2003년 이란에서 발생한 밤지진이 대표적 사례다. 이란의 경우 밤지진(규모 6.6)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3만4000명에 이르렀다. 내진설계기준이 대부분의 구조물에 적용되지 않아서다. 반면 1994년 미국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발생한 노스리지 지진(규모 6.7)은 사망자가 57명에 불과했다. 지진 규모가 비슷한 상황에서 사망자수에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미국은 내진설계기준이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많은 구조물에 적용돼 지진 피해가 극히 적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1988년 내진설계기준이 처음으로 제정됐지만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건물에만 적용돼 1988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내진설계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정 규모 이하의 건물들은 내진설계대상에서 제외돼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경주지진과 포항지진 이후 우리나라의 지진 대비 내진설계기준에 적합하지 않게 건설된 건물이나 내진설계가 되지 않은 건물의 내진보강이 시급한 과제로 꼽히고 있다.
다행히 정부가 지진 안전 확보를 위해 2035년까지 공공시설물 내진보강 100% 달성이라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5년간 3조5543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2025년까지 내진율 80.8%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경주와 포항지진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진앙 및 규모, 피해유형 등에 대한 기록이 상당 부분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민간건물의 경우 공공건물에 비해 지진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족하다는 평가다. 공공건물은 정부가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전국적인 내진 보강 작업을 하고 있는 데 비해 민간건축물에 대해서는 대책이 부족하다. 이에 따라 수많은 주거용 건물을 포함한 노후 민간건물들의 내진보강을 위한 대책을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구밀도 높은 韓 지진피해 우려
2021년 기준 전국 건축물 총 731만4264동 중 주거용 건물이 전체의 63%로 가장 크게 나타났다. 상업용 18%, 기타 12%, 공업용 4%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포항지진의 경우 필로티 건물에서 피해가 많이 발생한 점에 비춰 필로티 건물에 대한 안전 진단과 내진 보강이 시급한 상황이다. '필로티 구조'는 지상에 기둥이나 내력벽만 두고 개방해 놓은 건축물이다. 필로티 건축물은 기둥에 상부 하중이 집중돼 지진 발생 시 압력까지 더해져 기둥 상부에 균열이 발생해 건물이 붕괴할 수 있다.
국토부와 지자체가 실시한 '전국 도시형 생활주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도시형 생활주택 42만2800가구 중 88%인 37만가구가 필로티 구조로 건설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05년부터 필로티 구조에 대한 내진설계 기준이 반영되고 있지만 미흡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고층 건축물이 밀집한 도심지에서는 지진이 발생하면 건축물 용도, 시간대 등에 따라 인명피해가 대규모로 발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국내 발생 지진은 불의 고리에 위치한 중남미, 동남아시아와 같이 강진 가능성은 크지 많지만, 그에 반해 도시의 인구밀도는 높고 도시화, 시스템화가 돼 있어 내진보강이 제대로 안 될 경우 이란처럼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물론 경제사회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국가인 바티칸, 홍콩과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4번째로 인구밀도가 높고 OECD 국가 중에서는 1위이다.
세계적으로 지진에 의해 연간 만명 정도가 사망한다. 큰 지진의 경우 발생빈도는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그 피해 규모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2023년 튀르키예에서 지진(규모 7.8)이 발생한 지역은 사망자만 무려 5만1000명을 넘어섰으며 20만채에 가까운 건물이 붕괴됐다. 내진설계, 내진보강도 중요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건축물 붕괴와 인명피해 구조, 화재 진화를 위한 대비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인구 약 50만명이 거주하는 포항지진으로 피해 건축물이 약 5만여동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밀도가 높은 경기도와 서울, 부산 등이 특히 지진 발생으로 피해가 큰 지역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인명안전을 목표로 내진설계가 의무화될 필요가 있으며 국내 지반 특성의 경우 저층 구조물이 취약한 상황이므로 내진보강에 우선순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ktitk@fnnews.com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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