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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덕희'와 바쁜 경찰[기자수첩]

'시민 덕희'와 바쁜 경찰[기자수첩]


한 시민이 보이스피싱 범죄로 3200만원을 잃었다. 그런데 한 달 뒤, 자신을 속인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조직원은 범죄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총책에 대한 정보를 넘겨줬다. 그는 인근 경찰서에 총책의 인적 사항과 함께 모든 범죄 사실을 제보했지만 경찰에서는 바쁘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시민의 반복 제보로 경찰은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았다. 그러나 경찰은 시민에게 신고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공을 가로챘다. 이는 영화 '시민덕희'의 이야기이다. 지난 2016년 세탁소 주인 김성자씨가 겪은 실화를 소재로 썼다고 한다.

경찰서 민원실에 들어서면 자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시민들이 경찰 수사가 미진하다며 항의하는 모습이다. 레퍼토리는 비슷하다. 피해자로 호명되는 시민은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했다"며 "무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경찰의 항변도 이해가 간다. 내부에서는 수사 인력의 부족함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 지역의 한 경제팀 수사관은 "5명도 안되는 수사 인력으로 수백개가 넘는 보이스피싱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며 "사건 마다 신경을 쓸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실제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수사관 1인당 사건 처리 기간은 2020년 55.6일에서 지난 2022년 67.7일로 크게 늘었다. 경찰은 지난해 상반기까지 처리기간을 66.1일로 줄였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마음 속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소명 의식'이다. 경찰 수사 부서의 인기는 눈에 띄게 줄었다. 현장에선 수사 베테랑들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매번 지원자 모집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범인을 잡는 형사'가 되기 위해 경찰관이 됐으나 이제 자신을 '직장인'으로 규정하는 경찰도 많아졌다는 게 내부의 이야기다.

경찰의 수사 권한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에 이어 올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도 넘겨받았다. 권한이 커질 수록 우려되는 건 또다른 덕희, 김성자씨와 같은 한 명의 시민이다.

경찰은 수사관들의 처우 개선을 약속하며 국가수사본부를 출범했다. 처우 개선은 거창한 문제가 아니다.
경찰관 한 명이 시민에게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건 수사관 마음 속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민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왜 경찰이 됐는지도 알고 있고요. 전보다 더 나아 질 겁니다" 한 수사관이 한 말이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