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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포스코를 흔드는 손

[강남시선] 포스코를 흔드는 손
최갑천 산업부장
한반도 남단을 집어삼킨 역대급 태풍은 동틀 무렵이 되자 동해상으로 빠져나갔다. 밤새 공장을 지켰던 당직자들은 그제서야 안도했다. 그리고, 교대를 준비했다. 그때였다. 공장 한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놀란 근무자들은 부랴부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압연공장 인근 수전변전소였다. 전력이 차단되자 365일 불이 꺼지지 않던 공장은 암흑으로 변했다. 이어 공장 곳곳에 물이 차올랐다. 미처 손쓸 새도 없었다. 인근 냉천이 범람한 것이다. 속수무책이었다. 주요 공장 내부가 삽시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출하를 기다리던 막대한 철강제품들도 흙탕물 속으로 사라졌다. 54년간 쇳물을 토해내던 고로마저 멈췄다. 그렇게 한국 철강산업의 심장부는 한순간에 치명타를 입었다.

지난 2022년 9월 6일 새벽 포항제철소는 전쟁터였다. 국가기간산업의 현장이 어처구니없는 수마(水魔)에 삼켜졌다. 포스코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는 예상이 나왔다. 상황에 따라선 1년 이상 포항제철소가 정상가동을 못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퍼졌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너나없이 포항으로 달려갔다. 포스코의 한 임원은 "서울에서 내려가 보니 생각보다 훨씬 참혹했다. 그길로 한 달을 공장에서 지내며 직원들과 진흙과의 전쟁을 치렀다"고 당시를 전했다. 노사는 물론 소방, 경찰, 군, 지역 시민들까지 포항제철소 살리기에 한뜻이 됐다.

기업과 지역경제의 존폐 앞에서 모두가 사투를 벌였다. 그로부터 석달여 뒤 포항제철소는 고로가 정상화되고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이른바 포스코의 '힌남노 135일의 기적'이다.

힌남노의 기적은 세계 철강사에서 보기 드문 조기 위기극복 모델이다. 세계가 포스코인들의 단합과 강한 의지에 박수를 보냈다.

그랬던 포스코가 1년 만에 다시 흔들리고 있다. 가공할 재해에도 쓰러지지 않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회장 인선을 둘러싸고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다. 최정우 회장이 연임을 포기했지만 사태는 잠잠해질 기미가 없다. 회장 인선 역할을 맡은 사외이사들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다. 회장 인선 시기에 해외 호화 이사회 논란이 고구마 줄기마냥 터지는 것도 묘하다. 논란의 진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수사가 진행 중이니 향후 진위가 가려지겠지만 이사회에 대한 도덕적 타격은 심각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외풍이다. 일각에선 "정치권에서 각자가 미는 회장 후보들이 난립해 무차별 제보들이 나오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합리적 의심이 든다. 현재의 외풍은 목적성이 뚜렷해 보인다. 차기 회장을 외부인물로 채우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과거에는 내부인사 중에 지지세력이 달랐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이대로라면 '제2의 KT 사태'는 피할 수 없다. 구현모 전 대표의 연임을 막으려던 일이 6개월간 '대표공백 사태'로 이어졌다. 구 전 대표가 추진하던 디지코(DIGICO) 전략도 차질을 빚었다. 디지코는 통신사업으로 먹고살던 KT를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대변혁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글로벌 디지털 시장에서 KT는 반년의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포스코가 KT의 경영공백 전철을 밟는다면 그 파장은 훨씬 더할 수밖에 없다. 포스코는 87조원(2022년 기준) 매출에 4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5대 기업군이다. 글로벌 경기 민감도가 큰 철강산업에서 2차전지 중심의 종합소재 기업으로 대전환도 진행 중이다.

철강사업의 근간을 바꾸는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도 분수령에 와 있다. 대규모 투자 집행 등 빠른 의사결정과 추진력이 절실한 시기다.
포스코 미래를 좌우할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회장 인선공백이 길어질수록 선장 없는 포스코를 '흔드는 손'은 더 활개칠 게 뻔하다. 철강 경쟁국들에 빌미를 제공할 뼈 아픈 집안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cgapc@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