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라면의 첫 장을 연 기업은 삼양식품이다. 이른바 공업용 우지 사건 이후 경쟁업체에 밀리던 삼양은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K라면'의 중심에 삼양의 '불닭볶음면'이 있다. 이 제품의 지난해 수출액이 66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국내 라면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그 덕분에 삼양식품 매출도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1조원대에 들어섰다. 농심 '신라면' 수출도 24% 늘었고, 일찍이 러시아에 진출한 '팔도라면'은 기업들이 탈출하는 가운데서도 매출을 끌어올리며 선전 중이라고 한다.
1919년생인 고 전중윤 선대회장이 국내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을 내놓은 것은 1963년 9월 15일이다. 첫 광고는 그다음 달 신문에 실렸다(경향신문 1963년 10월 2일자·사진). 즉석 국수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식생활은 해결됐다'는 문구가 담겨 있다. 그 말대로 라면은 우리의 허기를 달래준 데서 나아가 '최애' 식품으로 발전했다. 비닐포장에 그려진 닭은 수프가 닭고기 맛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소고기 맛으로 바뀌었다.
전 회장은 강원 철원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를 나와 조선총독부에서 보험담당 공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광복 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창업에 참여,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어느 날 서울 남대문시장을 지나가던 그는 미군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을 우연히 보게 된다. 순간 1959년 일본 출장 때 먹어보았던 라면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계기로 전 회장은 1961년 보험업계를 떠나 삼양라면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삼양(三養)'은 세상을 구성하는 3요소인 하늘, 땅, 사람을 기른다(養)는 뜻이라고 한다.
5만달러를 정부에서 지원받았다. 제조법을 배워야 했다. 라면의 원조국가인 일본으로 건너가 라면업체 대표들을 잇따라 만났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과도한 요구와 냉대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묘조식품 오쿠이 사장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묘조식품은 수프를 따로 첨부한 라면으로 돌풍을 일으킨 기업이었다. 전 회장의 열정에 감복한 오쿠이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다만 기밀이기도 한 수프 제조기술은 직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받지 못했다. 그러다 반전이 일어났다. 낙심해 귀국길에 올랐던 전 회장에게 오쿠이가 공항에 비서를 보내 수프 제조기술이 적힌 편지를 몰래 전해준 것이다. 삼양라면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전 회장은 오쿠이와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처음 라면을 내놓자 소비자들은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옷감이나 실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삼양 직원들은 인파가 붐비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시식행사를 펼쳐 라면을 알렸다. 국수만 알던 소비자들은 서서히 라면의 맛에 빠져들었다. 출시 6년 후인 1969년에는 베트남에 처음으로 라면을 수출했다.
1989년에 일어난 '우지 파동'은 삼양식품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검찰청에 날아든 익명의 투서가 발단이었다. 라면을 튀기는 데 식용이 아닌 공업용 우지(소기름)를 사용한다는 주장이었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삼양식품, 오뚜기식품, 삼립유지, 서울 하인즈, 부산유지 등 5개사 대표와 실무자 10명을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8년 만인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우지가 1등급 식용은 아닌 2~3등급이지만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삼양식품은 큰 타격을 받은 뒤였다. 100만상자가 넘는 라면을 폐기하고 직원 3000여명 가운데 1000여명이 회사를 떠나는 수난을 겪었다.
30%를 넘던 시장점유율은 10%대까지 급락했고, 대규모 적자로 이어졌다. 반면 후발주자인 신라면에는 시장을 장악할 기회가 됐다. 전 회장은 아흔의 나이까지 열정을 잃지 않고 회장으로 일하며 삼양라면을 위기에서 구해 놓은 뒤 2014년 세상을 떠났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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