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베이징특파원·대기자
"한국은 우리 문화 훔쳐 가지 마세요. 왜 우리 것을 자꾸 훔쳐 가죠. 더 이상 우리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 말아요."
이른 아침 우리 일행을 향한 중국 초등학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설 연휴 첫날이던 지난 9일. 서울에서 온 지인들과 베이징의 티베트불교사원 융허궁을 참관하려고 이른 아침 긴 줄에 섰다가 당한 일이다.
앞줄에 있던 초등학생이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다짜고짜 큰 소리로 "한국이 중국 문화를 훔쳐 갔다"면서 소동을 피웠다. 후난성에서 온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이 어린이는 한국이 단오절을 훔쳐 갔고, 한복이나 각종 음식들도 다 중국에서 베껴 간 것인데 자기 것인 양 행세한다며 분해했다. 함께 있던 아버지의 만류에도 초등학생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인 한 분은 충격을 받은 듯 점심 자리에서 아침 '봉변'을 입에 올렸다. "초등학생이 어떻게 울분에 찬 태도를 취하게 됐을까"라며 당혹스러워했다.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과 국수주의적 흐름, 인터넷의 가짜뉴스와 문화종주권 논쟁 등이 점심 자리의 주제가 돼 버렸다.
2004년 단오제 사건은 우리 뇌리에서는 잊혀졌지만 중국 지방의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까지 잘못된 사실을 진실인 양 믿게 하면서 지금도 가짜뉴스를 재생산시키고 있다.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자 중국 측 일부 관계자는 한국을 '문화약탈국'으로 묘사했다. 인민일보 등은 "굴원의 제사 문화를 한국이 훔쳐 갔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오해를 확산시켰다. 무속신앙과 유교문화 등이 융합된 강릉단오제는 그 독특함을 인정받아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중국의 단오절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지만, 중국 정부와 언론은 강릉단오제에 대한 오해와 차이를 해명한 일은 없었다. 중국 일부 언론들은 오히려 "한국이 활자인쇄술, 중의학, 풍수와 같은 문화유산도 모자라 한자 소유권까지 시비 걸었다"며 더 나아갔다. 이 같은 스토리텔링은 지금도 상당수 중국인이 한국을 '중국 문화를 훔쳐간 도둑, 문화침략자'로 믿게 했다. 후난성 초등학생의 태도는 한중 간에 파인 골들을 확인하게 했다. 중국에 대한 공공외교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소홀히 해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요사이 한중 관계는 2016년 사드 사태 때보다 더 나쁘다는 말을 듣는다. 주중 한국대사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탱고도 손을 잡아줘야 추지요"라고 한중 관계를 비유했다. 중국은 불쾌감의 표시로 상대방을 접촉하지 않는 무시 정책을 종종 취한다. 우리에 대한 태도가 지금 그렇다.
일본과는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스시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담 때 시진핑 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별도 정상회담을 한 뒤 후속회담 등 각종 소통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난해 10월 유엔총회 기간 중국의 신장위구르족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전년도와 달리 중국을 배려해 가치외교를 접고 우호의 신호를 앞세웠다. 성명에 이름을 올렸던 일본은 중국과 한 달 뒤 정상회담을 했고, 우리는 외면당했다. 융허궁 앞에서 소리 지르던 초등학생처럼 잘못된 사실을 믿고 엉뚱한 주문만 하고 있는 것이 한중 관계의 현주소는 아닐까.
서로의 입장과 한계선을 더 명확히 하고, 쌓인 오해를 재인식하면서, 과도한 기대를 접어야 할 때이다. 그 위에서 공통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구동존이의 과감성이 아쉽다. 3월 말 하이난섬에서 보아오포럼이 열린다. 리창 총리 등 고위 당국자들이 참석할 것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처럼 '정부 2호 세일즈맨' 총리가 나서도 좋고, 그 정도 중량급 인사가 참석해도 좋을 것이다.
국격은 꼭 나라 크기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 시대도 거저 열리지 않는다. 주도하는 '스마트외교' '명민외교'를 기대한다.
june@fnnews.com 이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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