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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ARM의 동맹

英헛간서 출발한 칩강자
혁신과 유연성으로 석권
삼성 인텔, 각각 동행선언

[최진숙의 기술빅뱅] ARM의 동맹
최진숙 논설위원
"블랙호스 여관에서 우회전한 뒤 교회를 지나면 오른편에 ARM이 있습니다."

영국 반도체 기업 ARM은 1990년 처음 만든 브로슈어에 회사 가는 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회사는 케임브리지 스와프햄 불벡에 있었다. 세계 굴지의 테크기업들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회사에는 이상할 정도로 목가적인 장소였다고 한다. 가까운 들에서는 직원 바비큐 파티가 자주 열렸다. 영국 저널리스트 제임스 애슈턴이 쓴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2023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ARM은 영국 케임브리지 두뇌 13명이 모여 반도체 설계 틈새를 발견, 시장을 뒤집은 팹리스 기업이다. 칩 설계기업에 기본 설계도(IP)를 제공해 로열티를 받는다. 대가만 내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라도 라이선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반도체의 스위스'로 불린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칩 장악력은 절대적이다. 설계의 90%가 ARM의 것이다.

ARM의 성장사는 실리콘밸리 차고에서 출발한 많고 많은 미국 벤처신화에 밀리지 않는다. 1980년대 초 대처 정부가 컴퓨터 문맹 퇴치를 목표로 대대적인 PC 보급사업을 벌이던 시기 등장한 에이콘이 모기업이다. 에이콘이 정식 보급사로 선정되면서 사업 기반이 다져졌으나 두뇌들의 관심은 미래에 있었다. 칠면조 사육장으로 쓰였던 헛간을 개조해 만든 회사에서 이들은 책상을 둥그렇게 배치해 앉아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칩 연구에 매달린다.

미국 벨연구소의 논문 '명령어 세트를 줄인 컴퓨터에 대하여(the Reduced Institution Set Computer, RISC)'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칩이 구동되는 대부분의 시간 명령어들 중 통상 20%만 사용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나머지 명령어를 들어내고 자주 쓰이는 명령어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RISC는 간단한 명령으로 데이터를 잘게 쪼개기 때문에 인텔의 CISC에 비해 속도는 빠르고 전력소모도 적을 것으로 봤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능력이 훗날 노키아나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에 그토록 절실한 칩기술이 될 것이라는 걸 아는 이는 없었다.

저전력 ARM 칩을 세계표준으로 만들 것. 인텔이 장악한 PC 영역에서 인텔과 다투기보다 PC를 뺀 모든 영역, 그러니까 게임·통신·이미지 처리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기들을 공략할 것. 이 목표를 천명한 이가 전설의 세일즈맨 초대 최고경영자(CEO) 로빈 삭스비다. 비용을 줄이려고 헛간을 사옥으로 고른 것도 실은 그였다. 그는 200년 넘은 기둥 바로 아래 있는 다락에서 일했다. 그러면서도 고객을 찾아 세계를 뒤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ARM의 질주는 애플의 아이폰 시대, 스마트폰 혁명과 함께 시작됐다. 그사이 에이콘은 시장에서 사라졌고 ARM은 애플의 조인트벤처 회사가 됐다가 다시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대주주로 맞는다. 그때가 2016년이다. 그 뒤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드는 엔비디아가 ARM 인수작업을 벌인 바 있으나 영국 정부와 미국 경쟁사들 반대로 무산됐다. ARM은 누구의 소유가 돼선 안 된다는 시장의 공감대까지 형성됐다. 애슈턴이 ARM의 성공비결로 꼽은 단순한 아이디어, 개방성, 유연성과도 맥이 닿아 있는 이야기다.

지난주 삼성전자는 ARM과 동맹을 강화해 대만의 TSMC를 꺾을 경쟁력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다. 공교롭게 인텔도 다음 날 열린 행사에서 ARM과의 동맹을 외치며 2030년 삼성 파운드리를 제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르네 하스 ARM CEO는 직접 무대에 올라 협력을 약속했다. ARM CEO가 인텔 공식 자리에 선 것은 희귀한 일이다. 객석에선 탄성이 나왔을 정도다.

ARM의 칩은 애슈턴의 예상대로 어디에나 존재하며 점점 더 많은 곳에 사용될 것이다. 그 대신 누가 더 시너지를 낼지는 각자의 기술에 달렸다.
삼성의 혁신을 지지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인텔은 그날 ARM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픈AI 등 AI 거물 대부분을 동맹으로 호명했다. 부럽고 아찔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jins@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