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세뇌 당하는 사람들 '가스라이팅'>
여리고 의존적 성향, 가스라이터의 타깃
가해자에게 심리적 지배 당하다가 '복종'
피해자인지도 모른 채 죄책감에 시달려
전문가 "현행법상 범죄 입증 쉽지 않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편집자주]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등 어느 것 하나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서민의 삶,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살펴봐야 할까요. 파이낸셜뉴스는 신년 기획으로 일상 뒷편에 숨겨진 문제들을 연속 보도합니다. 이는 사회에 전하는 일종의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불이 희미해졌어요.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무슨 소리야. 또 없는 일을 상상해 내는 거야?"
1944년 개봉한 영화 '가스등(Gas Light)'의 대사다. 이 영화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로 아내를 현혹하는 내용이다. 남편은 보석을 훔치려 가스등을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고 이를 의아하게 여기는 아내에게 과민반응이라는 핀잔을 주며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이 같은 과정에서 아내는 점점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스등'은 심리적 학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요소로 나온다. 이때부터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용어가 '가해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심리적 수단을 이용해 사람을 조작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가스라이팅 피해 속출
'가스라이팅'이 사회적 문제로 자리매김한 건 최근 언론 등에서 자주 언급되면서부터다. 가스라이팅에 대한 국민 인식이 높아지면서 곳곳에서 "나도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라고 털어놓는 피해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20대 남성 A씨는 직장 상사로부터 "A씨는 엄청 좋겠다, 우리가 정규직 시켜줘서" "A씨 수준에서 최고의 대우야" "일할 기회를 주는 거야" 등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말을 매일같이 들었다. A씨는 점점 자신처럼 보잘 것 없는 직원을 뽑아주는 회사는 더 없을 것이라고 여기게 됐고, 그렇게 상사의 가스라이팅 속에 5년을 보내야 했다.
또 20대 여성 B씨는 3년여간 교제한 남자친구에게 오랜 기간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그가 남자친구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남자친구는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 잘못이 더 커"라며 B씨 탓으로 돌렸고, "나 정도 되니까 너랑 만나주는 거야" 등의 말을 일삼았다.
이처럼 가해자는 피해자와의 관계가 형성되면 협박하고, 다시 미래에 대한 기대 심리를 자극하는 식으로 통제한다.
임상심리학자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는 자신의 저서 '가스라이팅'에서 가스라이터의 특징으로 31가지를 제시했다. 이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가스라이터는 '조건부 사과'를 한다. 예를 들어 잘못을 저질러놓고 "미안해, 네가 그렇게 예민한 사람인 줄 몰랐어"라고 얘기하는 식이다. 또 삼각관계와 이간질을 즐기고 자신은 그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다. 상대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타인과 비교하는 발언도 자주 한다. 저자는 가스라이터들이 이러한 행동을 어쩌다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은 이러한 수법에 점점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된다. 그러면서 "정말 내가 예민한 거 아닌가?" "내가 미쳐가나 봐"라며 자기 의심을 지속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게 된다. 나중엔 가해자가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만족감까지 느끼며 오히려 가해자를 더 의지하게 된다. 당연히 학대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가해자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가스라이터의 주요 타깃은 '약자'
기초생활수급자가 자신을 가스라이팅 한 40대 남성에 무릎 꿇고 술을 따르는 모습. / 창원해경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불안한 심리나 의지할 곳 없는 상황을 이용하기 때문에 주로 취약계층과 같은 약자들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악질이다.
지난해 10월에 한 40대 남성이 가스라이팅을 이용해 기초생활수급자를 익사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이 조직폭력배 출신이라고 협박하며 피해자를 괴롭혀온 범인은 피해자에 술을 잔뜩 마시게 한 뒤 수영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피해자는 파도에 휩쓸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다.
40대 모텔 업주가 발달장애인인 주차관리원을 가스라이팅 한 사건도 있었다. 업주는 자신과 평소 재개발 문제로 갈등을 겪어오던 80대 건물주에 원한을 품고 주차관리원을 시켜 살해하게 했다.
여리고 의존적인 성향의 사람도 가스라이터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가스라이터들은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고 자신에 대한 자아개념이 잘 형성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가스라이팅에 노출되기 쉽다"라고 설명했다.
심리적, 상황적으로 취약한 상태인 사람은 가스라이팅 피해를 인지해도 빠져나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가스라이팅 수법을 이용한 범죄 사건들을 접하면, 제3자들은 '왜 당하고만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을 답답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변태냐' '너도 즐긴 거 아니냐'며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에 2차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곽 교수는 피해자가 오랜 기간 가스라이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점진적으로 피해자를 통제하는 가스라이팅 특성상, 피해자가 가스라이팅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빠져나오기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가해자에 대한 의존성이 깊어진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벗어났을 때 감당해야 하는 변화가 더 힘들게 여겨져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스스로 "저 사람이 처음부터 나쁘진 않았어. 언젠가 괜찮아질 거야"라고 합리화하며 가해자와의 관계를 견디게 된다는 것이 곽 교수의 설명이다.
"가스라이팅을 범죄로 규정하라"는 목소리 커지는데..
이렇다 보니 가스라이팅을 범죄로 규정해 가해자들의 만행을 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현행법과 제도에서는 상대의 심리를 조종했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고, 또한 어디까지를 가스라이팅으로 규정해서 입증할 것인지가 모호해 범죄로 규정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죄형법주의이기 때문에 법조문에 나와 있는 것 중 하나의 조항이라도 틀리면 법적으로 처벌할 수가 없다"라며 "심리적인 것을 수치로 나타내서 법으로 적용하면 모호성을 증폭시켜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다만 "판사가 보기에 가해자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데 있어서 장기간에 걸쳐 가스라이팅이란 수법을 사용해왔다는 판단이 된다면 양형에 있어서 고려될 수는 있다"라고 덧붙였다.
국내 사법기관은 실제로 2021년 6월부터 '가스라이팅 기반 범죄'를 양형 이유에는 기재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이 의심된다면?.."즉시 가해자와 멀어질 것"
게티이미지뱅크
가스라이팅을 이용한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해자 스스로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최초로 가스라이팅을 심리학 용어로 규정한 미국 심리학자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신호들을 제시했다. △자신이 애인, 배우자, 직원, 친구 혹은 자녀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 자주 의문을 갖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 어떻게 느끼는가 보다는 배우자가 좋아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가 없다 등이다.
만약 가스라이팅 피해가 의심된다면 그 즉시 가해자로부터 멀어지는 조치가 필요하다. 곽 교수는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 때 가해자와 붙어 있으면 분별이 어렵다. 가해자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둬야 한다"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상의해 보고 객관적인 시선을 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라고 조언했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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