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감췄던 카세트테이프가 복고 바람을 타고 부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었다. 레이디 가가와 같은 유명 가수들이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내놓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LP판을 무너뜨린 카세트테이프도 CD에 밀려나고 이제는 음원을 기기에 저장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 됐다.
카세트테이프를 발명한 사람은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엔지니어였던 루 오텐스다. 딱 3년 전인 2021년 3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000억개 이상의 카세트테이프가 팔렸어도 그는 큰 부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허비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3년 첫선을 보인 카세트테이프는 1970년대에 들어 세계 최초의 휴대용 플레이어인 소니 워크맨의 탄생으로 날개를 달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영어회화를 떠올린다. 문법이 거의 전부였던 영어학습에서 회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1972년 원어민의 생생한 음성을 담은 영어회화 카세트테이프 'English 900'을 내놓은 곳은 시사영어사였다.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영어 음성교재로 '영어회화의 정석'이라 할 만했다. 영자신문 기자 출신인 민영빈이 1961년 설립한 시사영어사는 그의 이름 이니셜을 따 YBM으로 바꾸어 매출액 1100억원대의 국내 최대 어학교육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2년 토익(TOEIC)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곳도 YBM이다.
'정철 영어'로 유명한 정철도 1세대 영어회화 교육자였다. 영어공부에 깊이 빠진 그는 영어학원에서 '일타 강사'로 명성을 떨치다 1979년 회화 카세트테이프를 내놓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영어교육 책을 내면서 처음에는 제목을 '영어 100년 사기극 이렇게 끝장낸다'라고 붙이려 했다고 한다. 정철은 지금도 영어TV와 정철어학원, 영어성경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AFKN 청취 등 여러 종류의 영어 듣기용 카세트테이프를 출시한 김철호도 '영어 리스닝'의 전설로 남은 사람이다. 유학을 간 적이 없는 그는 유학을 앞둔 학생들을 모아 놓고 영어를 가르친 명강사였다. 현재는 북한산 인근에서 온천을 개발해 운영 중이라고 한다. 사위인 개그맨 이윤석을 앞세워 온천을 홍보하고 있다.
민병철 중앙대 석좌교수는 카세트테이프를 포함한 '민병철 생활영어' 책을 100만부나 판매한 '국민 영어강사'였다. 이 책과 테이프가 한 질씩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민 교수는 TV방송을 10년 동안 진행하면서 비디오 영어회화 교육을 선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칭송하고 응원하는 댓글을 뜻하는 '선플' 운동을 이끌고 있다. '오성식 생활영어'도 1990년대까지 영어회화 교재로 이름을 떨쳤다.
이런 교재들이 나올 때까지는 원어민의 음성을 들으며 영어회화를 배울 길이 거의 없었다.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적었을뿐더러 사설 학원도 드물었다.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면서 학생들에게 정확한 발음과 회화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도, 교재도 없었다. 교과서도 그랬지만 교육방식도 독해 위주였다.
카세트테이프가 보급되기 전에는 음성과 함께 영어회화를 공부할 교재가 전혀 없었을까. 그런 것은 아니다. 신문 광고를 보면 미국인의 육성을 LP판에 담은 교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출판사 성문사가 1964년에 펴낸 '영어회화 레코드·북'이 그것이다.
광고에서는 "전 한국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리 나는 책"이라며 국내 최초의 영어회화 교재라고 소개하고 있다(조선일보 1964년 8월 1일자·사진). 'English 900'에 앞선 영어회화 교재의 선구자인 셈이다. 수준별로 기본, 중급, 고급 3편으로 나뉘어 있고 LP판은 총 8장이 첨부돼 있다. 황찬호·김종운 서울대 교수가 집필하고 AFKN 미국인 아나운서들이 녹음에 참여한 것으로 돼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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