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도쿄 혼네> ⑧드래곤볼
만화 싫어하던 드래곤볼의 아버지, 토리야마 아키라 별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원소스 멀티유스'
선생님 추모하는 드래곤볼 키즈
손오공 앞엔 중일 장벽도 없다
만화 '드래곤볼'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 AFP 연합뉴스·드래곤볼 공식 홈페이지
【도쿄=김경민 특파원】 지난 3월 1일 일본 만화계의 거장 토리야마 아키라가 68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그는 일본 소년 만화의 대명사인 '드래곤볼'의 작가인데요. 이전에는 없었던 세계관, 캐릭터의 압도적인 매력과 박진감 넘치는 격투 장면은 글로벌 만화 산업의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했습니다. 드래곤볼은 600만부 이상의 발행 부수를 자랑한 '주간 소년 점프'의 황금기이자 대표작이었는데요. 연재 4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여전히 새로운 스토리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일본 만화 지적자산(IP)의 전설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건프라 엑스포 KOREA 2018을 찾은 어린이가 드래곤볼 프라모델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만화 싫어하던 드래곤볼의 아버지
이 작품은 서유기의 세계를 기반으로 어린 소년 손오공의 이야기를 그린 모험 판타지로 시작되었습니다. 7개를 모두 모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드래곤볼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재 초기에는 인기가 부진하자 '천하제일 무술대회'를 중심으로 한 격투 액션으로 이야기의 중심 축을 전환했습니다. 이후 피콜로 대마왕, 사이어인 왕자 베지터, 우주의 황제 프리저 등 지구를 침략한 강력한 악당을 손오공이 물리치며 성장하는 스토리는 독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토리야마는 원래 만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요. 그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는 단지 '신인상 상금을 타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광고 회사에 잠깐 다니다 퇴사하고 백수로 지내던 어느 날, 심심풀이로 손에 쥔 만화 잡지에 신인상 모집요강이 실려 있던 것이 그와 일본 만화 산업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투고 작품은 수상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출내기 편집자였던 토리시마 카즈히코의 눈에 띄게 됩니다.
토리시마는 훗날 "효과음을 표현하는 '그리는 글자'가 스마트하고, 원고도 깨끗했다. 재능을 느꼈다"면서 "연재 데뷔작인 개그 만화 '닥터슬럼프'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정말 어처구니 없을 만큼 재미있었는데, 소년 만화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고 회상했습니다.
토리야마는 1981년 '닥터슬럼프'로 출판사 쇼가쿠칸 만화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만화계의 칸 영화제라고 불리는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40주년 특별상을 손에 쥐기도 했습니다.
1982년의 토리야마 아키라. 연합뉴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원소스 멀티유스'
토리야마의 대표작 '드래곤볼'은 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나 비디오 게임으로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연재는 1984년 슈에이사의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에서 시작되어 199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작품 단행본은 20개 넘는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누적 발행 부수가 2억6000만부에 달합니다. 슈에이샤의 작품 중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원피스', '슬램덩크' 등이 발행 부수 1억부를 돌파한 작품들이죠.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하고 토리야마가 각본을 맡은 영화 '드래곤볼 슈퍼:슈퍼 히어로'(2022년 개봉)는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 138억엔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미국에서 1위로 데뷔해 전 세계 주말 박스오피스 랭킹 1위에 오르며 해외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만화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드래곤볼과 손오공은 킬러 콘텐츠임을 증명했습니다.
드래곤볼은 원피스와 함께 토에이의 주요 수익원입니다. 해외 저작권 매출액은 115억엔으로 토에이 전체 매출액의 45%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올해도 가을께 드래곤볼의 새 애니메이션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선생님 추모하는 드래곤볼 키즈
드래곤볼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다이남코홀딩스(HD)는 가정용 콘솔과 스마트폰용 게임은 물론 피규어, 카드 게임 등 드래곤볼의 IP를 사용한 상품 등을 취급해 왔는데요. 만화가 처음 연재됐을 때 카드 자판기 'Carddas'로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유희왕, 포켓몬스터 같은 카드 게임의 시초가 드래곤볼이었습니다.
반다이남코HD의 드래곤볼과 관련된 글로벌 피규어 매출은 최근 10년 동안 8881억엔에 달했습니다. 올해까지 누적 전망치를 합산하면 1조엔을 넘을 것이 확실시됩니다.
소년 점프는 "토리야마 선생이 그린 만화는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읽혔고 사랑받았다"면서 "그가 만들어낸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과 압도적인 디자인 센스는 많은 만화가와 창작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습니다.
토리야마가 넓혀온 만화 IP 시장의 길은 다음 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현재 약 60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원피스의 제작자 오다 에이치로는 슈에이샤의 홈페이지에 "세계에 갈 수 있다는 꿈을 보여줬다"며 토리야마를 추모했습니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책. X 캡처
입지전적 발자취를 남긴 토리야마를 추모하는 메시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지 공영방송 NHK는 고인의 별세 소식을 속보로 알렸고,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 등 주요 신문은 부고를 머리 기사로 배치했습니다.
만화 '나루토'의 작가 기시모토 마사시는 "초등학교 때 드래곤볼과 닥터 슬럼프라는 만화와 함께 자랐으며 싫은 일이 있어도 매주 '드래곤볼'이 그것을 잊게 해줬다"면서 "시골 소년인 내게 그것은 구원이었다"며 고인의 기렸습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소셜미디어 X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토리야마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추모의 글을 올렸습니다.
드래곤볼의 해외 트위터 계정은 8일 토리야마의 부고를 영어로 알렸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소리는 전 세계에서 쏟아졌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토리야마 아키라와 그의 연인 수백만 명에게"라는 글을 올리면서 토리야마가 2021년 그에게 선물한 컬러 사인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미국 가수 크리스 브라운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토리야마의 사진을 올려 "어린 시절을 형성해 주었다"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크리스 브라운은 슈퍼카 람보르기니에 드래곤볼 시리즈의 주인공인 손오공을 그려넣을 만큼 열렬한 팬으로 유명합니다.
2019년 11월 미국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행사에서 공중에 떠 있는 손오공의 풍선. X 캡처
손오공 앞엔 중일장벽도 없다
뉴욕타임스는 '닥터슬럼프' 등 토리야마의 작품이 전 세계에 알려져 '뒤를 잇는 몇 세대의 만화가나 애니메이션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론했습니다.
또 영국 가디언은 '드래곤 퀘스트' 같은 게임 시리즈 캐릭터 디자인에서도 많은 실적을 남겼다고 소개했습니다.
미국 CNN은 드래곤볼 시리즈가 10대부터 어른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일본 콘텐츠 중 가장 성공한 세계적 히트 작품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정보 사이트 IGN은 토리야마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애니메이션과 게임계의 전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토리야마와 드래곤볼은 경색된 중일 관계마저도 녹이는 문화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중국 외무부의 마오닝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토리야마 선생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유족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한다"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는 "고인은 저명한 만화가로, 그의 작품은 중국에서도 깊은 환영을 받았다"며 "적지 않은 중국 네티즌 역시 그의 별세에 애도를 표했다는 데 주목한다. 우리는 일본의 더 많은 식견 있는 사람이 중일 문화 교류와 양국의 우호적인 사업에 적극 뛰어들 것이라 기대하고, 그렇게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토리야마는 2013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만화에 메시지가 없다'는 질문에 "제 만화의 역할은 오락에 철저한 것"이라며 "(독자가)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무엇도 남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오로지 오락 만화만을 그렸다는 토리야마, 그는 떠났지만 그가 만든 드래곤볼은 영원히 죽지 않는 IP로 남았습니다.
일본에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문화가 있습니다.
혼네는 진짜 속마음이고, 다테마에는 밖으로 보여주는 겉마음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은 좀처럼 혼네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일본은 다테마에의 파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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