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영화 '존 윅 4' / 사진=연합뉴스
“오랜만에 청불 영화 한 편 어때?” “재밌는 거 나왔어?” “주인공이 완전 죽인대.” “그래? 제목이 뭐야?” “존 윅 4. 혼자 140명을 죽인대.” “이상해, 우리 방금 청불 영화 본다고 하지 않았어?”
결론부터 말하면 이상한 게 아니다. 관객 92%는 ‘청소년관람불가(청불)’ 하면 ‘야한 영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야한 영화’는 청불 영화의 비주류이고, ‘존 윅 4’처럼 ‘폭력 영화’가 주류다.
혼자 하는 주장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청불 흥행작 100편의 심의 결과를 분석했다. 폭력성(87편), 주제(72편), 공포(63편), 모방위험(59편), 대사(50편), 선정성(29편), 약물(18편) 순이었다. 선정성(신체 노출과 성적 행위의 표현)은 폭력성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은밀한 영화들, 즉 5개관 이하 ‘성인물(에로)’ 3778편을 포함해도 바뀌는 건 없다. 어차피 관객이 ‘야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만나긴 힘들다.
영화 '원초적 본능1'(1992) / 사진=뉴시스
미리 걱정하면 영화관에서 아예 사라질 판이다. 5년 단위로 비교하면, ‘야한 영화’는 5편에서 0.8편으로 급격히 줄었다. 반면 폭력 영화는 8.4편에서 9편으로 증가했다.
친숙한 영화도 떠오르지 않는다. 관객 100만명을 넘긴 최근 영화가 ‘바람 바람 바람’(2018), 그게 벌써 6년 전이다.
짓궂게 말해서 “야한 영화는, 미친 짓이다”. 수입사든, 제작사든 청불 영화로 폭력 영화를 선택하는 게 정상이다.
이걸 뒤집으면 ‘성인전용관람’ 영화에 폭력만 있다. 그래서 ‘야한 영화’의 부재는 영화계가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는 다양성 문제이기도 하다.
다양성은 성인 관객에게도 중요하다. 맨날 똑같은 영화만 있는데 굳이 영화관에 가야 할까? 시장 침체의 그림자에서, OTT의 심연에서, ‘야한 영화’가 성인 관객을 해방할 수 있다.
영화 '바람난 가족' / 명필름 제공
첫째, ‘야한 영화’가 50대 관객을 구하리라.
‘야한 영화’를 청불 멜로·로맨스 및 드라마 장르로 좁혀 분석했다. 50대의 선호도가 가장 뚜렷했다. 그리고 예매 데이터 분석 결과, 이 연령대는 매년 비중이 커지고 있다. 영화관들의 노화 현상이 아니라면, ‘야한 영화’의 잠재 관객이 늘고 있는 셈이다.
하필 50대일까? 왜 증가할까? 무엇을 원할까? 어디서 왔을까?
그들은 20대 때 청불 영화를 보며 데이트했다. 서른 전후로 연인은 부부가 됐고 부모가 됐다. 관객에서 보호자가 됐다. 청불 영화는 ‘데이트 영화’에서 ‘경계 영화’로 바뀌었다. 자녀 나이 스물, 임무 종료. 그사이 그들은 50대가 됐다. 50대 관객의 증가? 임무를 마친 이들이 다시 ‘관객’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런데 돌아와 보니 청불 영화가 이상하다. 자녀들과 실컷 봤던 12세, 15세 영화들에 피칠갑 좀 더 해서 청불 영화랍시고 파는 영화들 뿐이다. 그들이 알던 청불 영화는 이제 없다.
'깊고 푸른 밤'(1985), '나인 하프 위크'(1986),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원초적 본능'(1992), '연인'(1992), '결혼 이야기'(1992),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정사'(1998), '해피 엔드'(1999), '미인'(2000),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50대 관객이 엄마 아빠가 되기 전에 봤던 청불 영화들이자, ‘자녀와 독립한 관객’으로서 원하는 영화들이 그런 영화들이다.
둘째, ‘야한 영화’가 20대 관객을 구하리라.
예매 데이터 분석 결과, 20대 관객 비중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영화 시장에 나쁜 신호다. 더 나쁜 건 영화계도 극장계도 알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다. 방치에 가깝다. ‘야한 영화’가 방치된 그들을 데려올 수 있다.
김형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성인 관객이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청불 영화가 인생의 첫 청불 영화는 아닐 수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미성년자 57.5%는 청불 영화를 이미 봤다. 올해 성인인 2005년생은 67.7%가 봤다.
하지만 청불 영화의 ‘첫 경험’은 유효하다. 관람등급을 몰라도 되는 자유, 아무렇잖게 청불 상영관에 입장하는 경험, 그게 청불 영화의 진짜 매력이다. 그 체감도는 갓 스물이 ‘야한 영화’를 만났을 때 절정이다. 한마디로 ‘야한 영화’는 관객의 성인식이다.
이런 거다. '존 윅 3: 파라벨룸'(2019), '나쁜 녀석들: 포에버'(2020),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2021), '불릿 트레인'(2022), '존 윅 4'(2023)가 청불이라는 걸 20대 관객이 기억이나 할까? 재밌는 영화일지언정 성인식 영화일 순 없다.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20대 잠재 관객이 최근 5년만 잡아도 2000만명이다.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사진=뉴스1
셋째, 봉감독은 어디 있는가?
요즘은 ‘자녀와 독립한 50대 관객’에게도, ‘부모와 독립한 20대 관객’에게도 주먹질과 칼부림과 총질만 보라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재작년 장철수 감독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22)는 재평가해야 한다.
관객 규모가 비슷했던 20년 전은 어땠을까? 그때는 '명필름'이 ‘바람난 가족’(2003)을 제작해 베니스 영화제에 보냈다. 또 봉만대 감독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을 ‘기획’했던 ‘시대’였다. 명필름은 어디 있는가, 봉감독은 어디 있는가, 성인 관객을 이 지루함에서 구하라.
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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