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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적대국 담론 강압과 평화 담론의 신기루 [fn기고]

 -반길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지난해 말 이후 한국에 '적대국' 규정, '통일' 원칙 폐기, 용어 삭제 등 정책 펴
 -통일 관련 조직 해체... 올해 3월 대남성명 등 주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도 모두 해체
 -北이 마치 과거 한국을 우방국으로 규정한 것처럼 호도하는 '신기루' 불러일으켜선 안 돼
 -한반도서 두 국가 영구 공존 아닌 '대화 단절' '무력에 의한 통일' 의미하는 호전적 메시지
 -한국, 과거 일시적 데탕트에 북한 주적 규정 꺼리는 행태 반복... 북에 레버리지만 높여줘
 -'평화 담론' 한국 약자로 설정하는 폐해 낳아, 대북 협상력 저하·군사대비태세 약화 불러
 -존재하지 않는 가짜 평화 신기루 벗어나 평화는 안보 통해 달성된다는 사실 직시해야

[파이낸셜뉴스]
북한의 적대국 담론 강압과 평화 담론의 신기루 [fn기고]
반길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실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신기루(蜃氣樓)라고 말한다. 바다로 들어가면 대합조개로도 변하는 노란새가 도술을 부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고대 중국에서 표현한 것이 어원이다.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헛된 꿈을 일컫는 것으로 사막에서 마치 물을 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흔히 신기루라 표현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적당히 타협하면 평화가 가능한 것이라는 헛된 기대도 신기루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 북한은 한국을 ‘적대국’이라 규정한 후 이를 행동화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남북관계를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 원칙 폐기를 선언했다. 나아가 올 1월 15일 “통일”과 “민족대단결” 등의 용어 삭제 필요성을 언급했고 그 이후 고강도 적대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다. 지난 1월 12일에는 통일 관련 단체인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등을 정리했고, 1월 15일에는 남북회담 및 교류를 담당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등을 해체했다. 나아가 지난 3월 23일 북한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회의를 열면서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하면서 이 조직을 해체했다. 1949년 출범한 조국전선은 남북문제와 대남성명을 주도했던 기구였다는 점에서 이 조직의 해체는 북한이 기존 남북관계를 폐기했음을 강하게 현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곱씹을 대목이 있다. 첫째, 한국에 대한 북한의 적대국 규정의 신기루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1950년 침략전쟁인 6·25전쟁을 일으켰다. 북한은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했기에 침략에 나선 것이고 그런 침략전쟁에 기반을 둔 북한의 군사전략은 70년 이상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 최근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했다는 주장이 마치 과거에는 우방국으로 규정한 것처럼 신기루는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는 의미다. 둘째, 북한의 통일 폐기론의 신기루다. 김정은이 통일 정책을 폐기했다는 의미는 한반도에서 두 국가로 영구 분단된 채로 지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대화’를 통한 통일이 아닌 ‘무력’을 통한 통일을 하겠다는 호전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보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적대국 규정, 통일 폐기론은 한국의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실제가 아닌 거짓을 보도록 호도한다는 측면에서 신기루 성격이 짙은 발언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이 북한 발언의 진의를 제대로 간파하는데 장애를 제공한 것 중에 ‘평화 신기루’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한 후 70년 이상 적화통일의 표적으로 삼아왔지만 한국은 스스로가 일시적인 한반도 데탕트에 취해 북한의 주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꺼려하는 행태가 이따금씩 반복되었다. 대표적으로 2004년 국방백서는 북한군을 “주적”이 아닌 “직접적인 군사위협”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2010년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으로 규정 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2018년 이 표현이 삭제되고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등장했다. 2022년 국방백서에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의 우리의 적”이라는 규정이 재등장했지만 일관성이 결여된 채 자주 바뀌는 적성 규정으로 북한에게 레버리지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을 삭제하고 한미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하거라 축소하면 “평화”가 조성된 것이란 기대는 헛된 꿈이자 신기루라는 사실이 최근 북한의 한국에 대한 무력전쟁 준비 모습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즉 북한의 적대국 담론은 평화 담론의 후폭풍이자 신기루라 볼 수 있다. 평화 담론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북한을 강자로 한국은 약자’로 설정시키는 폐해를 낳았다.
이로 인해 한국은 대북 협상력이 저하되고, 군사대비태세도 약화되는 악순환에 직면하면서 평화 달성이 되레 더 어려워지는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평화를 진짜평화처럼 바라본 신기루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다. 평화는 안보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리=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