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껌 씹는 사람을 잘 볼 수 없게 됐다. 물론 자동차에는 졸음 쫓는 용도로 껌을 비치해두는 사람이 여전히 많지만, 길거리나 공용공간에서 껌을 씹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왜 그럴까. 그러잖아도 줄고 있던 껌 판매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외출이 제한되고 마스크를 착용하게 되자 껌을 더 씹지 않게 된 것이다. 지난해에는 껌 소비가 늘었다. 국내 껌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롯데웰푸드는 지난해 껌 판매고가 25% 늘어났다고 반색하고 있다. 그러나 일시적 '기저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껌 시장 규모는 2003년 5000억원대에서 20년 만에 10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껌을 잘 씹지 않는 이유는 껌 파는 기업도 잘 모른다고 한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첫째는 젤리나 캔디, 커피, 에너지음료 등 대체품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구취를 없애주는 가글 제품이 일상화된 탓도 있다. 거리가 깨끗해져서 사실 껌을 씹다 버릴 곳도 마땅하지 않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불량, 반항, 일탈을 상징하는 껌의 이미지 때문이라고도 한다. 껌을 씹으면 '아재'나 '아줌마' 느낌이 나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럴싸한 추론이다. 기호품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듯하다.
껌은 금연보조용으로도 많이 이용됐는데, 담배 모양의 '시가껌'이라는 제품이 나온 적도 있다(조선일보 1966년 2월 22일자·사진). 시가껌은 당시 '대박' 상품이었다. 도·소매상들이 시가껌을 확보하려고 제조사인 해태제과 앞에 장사진을 쳤고, 출하 즉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했다고 한다. 유사품 30여종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지금은 흡연자 자체가 크게 감소했으니 껌도 덩달아 수요가 줄었을 수 있다. 껌은 건강에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턱 관절장애의 원인이 된다고도 하고 치매예방이나 기분전환 등 정신건강에 좋다고도 한다.
껌을 발명한 때와 사람을 특정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19세기 중엽, 미국인 토머스 애덤스라고 한다. 천연고무인 치클에 향료를 섞어 만든 그의 껌회사는 1876년에 설립됐다. 납작한 막대형의 껌을 고안, 세계에 널리 보급한 기업은 1891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업한 '리글리'다. 하찮은 돈을 '껌값'이라고 하지만 리글리는 껌을 팔아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올해 준공 100주년을 맞은 리글리 빌딩은 시카고의 명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소개된 국내 껌의 역사도 100년이 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일제는 고무가 원료인 껌 생산도 통제했다. 지금 껌의 원료로 널리 쓰이는 초산비닐수지는 일본이 치클 대체용으로 착안해 낸 것이라고 한다.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나눠준 껌 맛을 본 한국인들의 껌에 대한 갈증은 컸다. 껌 생산은 당시 기술력이 부족한 국내 제과업계로서는 큰 난제였다. 거의 수공업 수준으로 어렵사리 국내 최초의 껌이 나왔다. 1956년에 출시된 '해태풍선껌'이다. 만들어낸 기업이 해태제과다. 처음 나왔을 때는 송진 냄새가 났고, 거칠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오리온도 껌을 내놓았다. 부산의 동성제과라는 곳에서도 곧이어 껌을 발매했다는 신문광고가 있다.
해태제과가 1959년 출시한 '슈퍼민트'는 기계를 이용해 만든 최초의 껌이었다. 슈퍼민트는 국민 껌으로 각광받았다. 해태제과는 이후 일본에서 껌 제조시설과 자동포장기 등을 도입, 신제품 개발에 나섰다. 새로 나온 껌이 시가껌과 '셀렘껌'이다. 껌 시장의 리더는 나중에 롯데로 넘어갔다. 고 신격호 롯데 회장은 1947년부터 일본에서 껌을 생산했다.
롯데는 1956년 일본에 상륙한 리글리와 10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1967년 한국에서 설립된 롯데제과는 '쿨민트껌' '바브민트껌'을 내놓으며 해태를 제치고 껌 시장을 장악했다. 롯데그룹을 탄생시킨 것이 껌인 셈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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