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천 산업부장
2000년대 초 개인 이동수단인 세그웨이(Segway)의 출현은 센세이션이었다. 미국의 작은 로봇회사가 개발한 세그웨이는 혁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정도였던 개인 이동수단의 혁명이었다. 많은 어른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막상 출시되자 결과는 처참했다. 5000달러의 가격은 소비자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수 국가들은 법적 규제와 안전 논란으로 도입을 불허했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수천대 판매에 그치면서 퇴출됐다. 이후 중국 샤오미의 자회사에 인수돼 이제는 기억에서 흐릿하다.
1990년대 말 시티폰을 기억할 것이다. 개그맨 김국진이 공중전화 앞에서 휴대폰으로 특유의 "여보세요"를 외치던 TV 광고. 모두가 열광했다. 수신만 되는 삐삐(무선호출기)와 찰떡궁합이었다. 그러나 발신 전용 휴대폰은 태생부터 한계가 명확했다. 낮은 통화품질은 그렇다 쳐도 공중전화 근처에서만 터지는 이동성의 제약은 도리가 없었다. 셀룰러폰을 압도하는 가격경쟁력도 얼마 못 가 소비자의 외면을 막지 못했다.
CD를 대체할 것처럼 보였던 레이저디스크, 움직이는 TV였던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도 단명한 제품들이다. 이들 제품의 공통점은 '캐즘(chasm)'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캐즘은 원래 지질학 용어다. 지층이 단절된 틈을 뜻한다. 실리콘밸리의 컨설턴트인 제프리 무어가 1990년대 초반 스타트업의 성장 과정을 빗대면서 마케팅 용어가 됐다. 어떤 상품이나 기술이 주류(mainstream) 시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시적 정체에 빠지는 현상이다.
수많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캐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쓰러진다. 반대로 캐즘을 넘어서면 대중화의 과실을 오랫동안 맛볼 수 있다.
애플 아이폰, 아마존 전자서점, 테슬라 전기차, 구글 유튜브, 스포티파이 스트리밍 서비스 등 극복사례는 수없이 많다. 아마존은 전자상거래에 이어 클라우드컴퓨팅(AWS) 분야에서도 또 한번 캐즘을 극복했다.
요즘 전기차 시장을 캐즘이라고 한다. 1년 전만 해도 전기차 배터리 관련주는 '제2의 코인'으로 여겨졌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시가총액이 폭등했고 에코프로는 단숨에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배터리 산업은 급격한 침체기다. 주가는 반토막나고, 실적은 적자로 돌아섰다. 전기차 침체는 고금리, 광물가격 상승, 수요 감소, 보조금 정책 등 여러 변수의 결과물이다. 침체의 골짜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배터리 소재사, 배터리사, 전기차 업체들은 이르면 하반기 반등을 꿈꾸고 있다. 아니, 확신하는 눈치다. 근간은 역행할 수 없는 전기차 시대의 믿음에서다. 주요국들이 2030년 이후에는 사실상 내연기관차 생산을 멈추고 전동화 시대로 전환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31개 국가에서 순수 전기차(EV)의 신차 판매 점유율이 5%를 넘어 '티핑 포인트'(변곡점)에 도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통상 신차 비중이 5%를 넘으면 4년 이내에 25%까지 확대되는 주류기에 접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터리 업계의 기대는 허언은 아닐 것이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분명 데스밸리(Death Valley·죽음의 계곡)는 아니다. 앞서 시장에서 사라진 신제품들과는 본질이 다르다. 저탄소와 친환경 에너지가 글로벌 경쟁력의 핵심인 시대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장밋빛 꿈은 경계하는 게 낫다. 전기차 시장 대중화는 경제변수 외에도 지정학적 요인이 수두룩하다. 당장 올 들어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처음으로 역성장한 게 현실이다. 테슬라는 중국 BYD는 물론 벤츠와 BMW에도 일부 국가에서 전기차 판매를 추월당할 위기다. 갈라진 틈은 의외로 깊을 수 있다.
캐즘을 극복할 여러 전략들이 있다. 지속적인 혁신, 가격 인하, 호환성 확대, 마케팅 강화, 파트너십 구축 등이다. 지금은 장기전을 대비해야 할 때다.
cgapc@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