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력들이 일군 기적
부흥과 쇠락의 갈림길에
정치의 복원, 그래야 희망
최진숙 논설위원
1962년 2월 현대중공업 울산 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울려 퍼진 박정희의 연설문은 비장감이 넘친다. "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신생 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로 시작한다. 하이라이트는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 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 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갈 것"이라고 한 대목이었다.
산업도시 울산은 그렇게 '겨레의 빈곤탈출'을 목표로 출발했다. 울산은 일제강점기 석유 비축기지가 있던 곳이다. 아래로는 부산, 위로는 서울, 만주를 잇는 철로의 연결점으로 오랫동안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눈 밝은 관료들이 울산을 국가공업단지로 일찌감치 지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제가 남긴 정유공장을 기반으로 굴지의 석유화학단지가 구축됐고, 세계 최강 조선소와 세계 '톱3' 자동차 회사가 세트로 모여 있는 지역, 그곳이 울산이다.
산업화 기적의 주역을 꼽으라면 한둘이 아니다. "조선업이라는 것이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들어 바다 위에 띄우고 중력에 의한 추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 더 있느냐"고 했던 이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다. 기술도, 부지도 없는 상태에서 보란 듯 선박을 수주하고 해외에서 돈까지 빌린 이 뚝심의 사업가가 없었다면 한국 현대산업사는 달랐을 것이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인력 공급계획을 매년 수립했다. 기술인력 범주에는 기능직, 생산직까지 포함됐다. 막 배출되기 시작한 대학 이공계 인력은 잠을 설쳐가며 기술을 익히고 도면을 그렸다. 기능직은 밧줄 하나에 매달린 채로 작업을 했다. 변변한 학력도 없이 직업훈련소에서 글과 기술을 깨친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세계 5대 제조업 강국은 이들의 헌신에 큰 빚이 있다.
노동계급의 중산층 신화도 여기서 꽃을 피웠다. 조선소 출신 사회학자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성실 근면한 청년이면 일해서 번 돈으로 결혼하고 집 사고 아이 낳아 키울 수 있었던 것이 울산의 산업화 이후 50년 역사"라고 단언한다. 울산의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343만원(2020년 기준), 서울(374만원)에 이어 전국 2위다. 1인당 지역내 총생산(GRDP)으로 따지면 1990년대 중반부터 20년 가까이 울산이 1위였다.
산업수도 울산의 균열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다. 울산의 두뇌였던 제조업 설계인력이 먼저 떠났다. 연구개발(R&D) 센터들이 줄줄이 수도권으로 옮겨갔다. 회사는 자동화, 로봇 도입을 밀어붙이고 노동자의 숙련에 기반을 둔 업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갔다. 비정규직·외국인 비중을 크게 늘려도 괜찮은 시스템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해외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양 교수가 최근 펴낸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에 나오는 내용이다.
울산의 쇠퇴는 노조가 스스로 높이 세운 울타리 탓도 크다. 원청 정규직들은 강성투쟁으로 복지를 쟁취하면서 비정규 하청근로자의 손은 잡아주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로 떠오른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형도 여기에 있다. 대규모 공장 정규직 채용문은 갈수록 좁아졌다. 특정 시점(1970~90년대)에 입사한 이들이 누렸던 혜택을 다음 세대가 이어갈 수 없다는 현실이 청년들 미래를 짓누른다. 울산 청년인구는 2015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휘청이는 지역은 비단 울산만도 아니다. 전국 산업도시 전체에 불어닥친 문제다. 해법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진일보한 노사관계는 물론이고 4차산업의 거대한 물결을 헤쳐 기존 산업의 부흥, 신사업 창출에 불이 붙어야 한다. 앞서 침체를 겪었던 해외는 법까지 만들어 공장 짓는 기업에 무차별 보조금을 퍼붓고 있다. 제조업 기반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극한의 총선 잔치는 끝났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선심, 밑도 끝도 없는 복수 공약이 판을 쳤다.
잔치 비용을 국민과 기업이 치르게 해선 곤란하다. 3류, 4류 정치에서 경제는 숨을 못 쉰다. 이제 현장을 챙길 때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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