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발표된 황석영 작가의 '삼포가는 길'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떠돌이 노동자와 술집 작부의 인간적 유대감과 애환을 그려낸 단편소설이다. 영화로도 제작돼 흥행에 실패했어도 제14회 대종상 우수작품상을 받았고 '한국 영화 100선'에 선정됐다. 삼포는 가공의 지명인데, 이 소설의 배경으로 알려진 전북 부안 계화도의 한 포구로 보면 된다.
변산반도 북쪽, 동진강 남쪽에 있는 계화도는 대한민국 1호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됐다. 새만금 방조제의 안쪽이다. 황 작가는 감옥생활을 하다 계화도 간척사업에 동원됐다고 한다. 광고(조선일보 1967년 5월 3일자·사진)에 간척사업의 얼개가 나와 있다. 계화도의 양쪽 끝과 육지를 연결해 방조제를 건설했는데, 길이가 12.5㎞ 정도였다. 매립면적은 4250정보(약 42㎢)로 돼 있다.
간척사업을 완공한 기업은 동아건설로 돼 있고, 대표 최준문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과 네덜란드 등 선진국 기술진도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의 난공사를 완공하면서 동아건설은 주목을 받았다. 1920년생인 최준문은 현대의 정주영과 더불어 한국 건설의 1세대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건설회사 직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광복 직후 충남토건사를 설립하고 1949년에 동아건설합자회사로 바꾸어 지방에서 저수지 공사 등을 했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이후 전후복구 사업에 참여하면서 동아건설의 사세는 커졌다.
동아건설이 급성장한 계기는 중동 진출이었다.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해외사무소를 세워 대형 공사를 잇따라 따내 기술력을 과시했고, 1977년부터 2년간 국내 시공능력 평가순위가 2위까지 올라갔다.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세계 최대 규모인 36억달러짜리 대수로 공사에 참여해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서울 반포지하상가를 만든 기업도 동아건설이다.
1977년 최 창업주의 아들인 최원석이 일찍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여느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동아건설도 업종을 다변화해 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 아파트 건설에도 손을 뻗치고 대한통운과 시티백화점, 동해생명 등 물류·유통·보험업 등에까지 진출해 1987년에는 동아그룹의 전체 종업원이 3만명을 넘어섰다. 재계 순위도 10위로 10대 그룹에 들었다. 동아건설은 한강 원효대교를 건설해 국가에 무상 기부하고, 월성과 울진의 원전을 짓는 등 성장세를 이어갔다.
최원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영능력을 보여주었지만,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4차례의 결혼과 4차례의 이혼으로 세간의 구설수에 오른 최 회장의 사생활도 경영에 악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첫번째 부인은 미스코리아 출신이었고, 펄시스터즈 출신인 배인순씨 등과도 재혼한 것은 항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동아건설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김포매립지 문제였다. 1978년 박정희 정부는 식량 증산을 위해 현대건설과 동아건설에 간척사업권을 줬는데 현대는 서산, 동아는 김포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였다. 10여년의 공사 끝에 동아건설은 약 1500만㎡의 매립지를 소유하게 됐다. 이 가운데 인천 서구 쪽 매립지에 놀이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워 주거·상업용지로 변경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이곳에 시설투자를 하겠다며 방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농지로 개발된 매립지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은 특혜라며 절대 허가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동아 측은 헐값에 매립지를 넘겼고, 외환위기 이후 몰아닥친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그룹이 붕괴되고 말았다. 동아건설은 간척으로 흥해 간척으로 망한 셈이다.
그 간척지는 농지로 쓰이지 않았고, 나중에 택지로 개발돼 현재 청라국제도시와 검단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그때 허가를 받았다면 동아그룹의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최 회장은 말기암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10월 사망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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