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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문화촌 이야기

[기업과 옛 신문광고] 문화촌 이야기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국민 동요 '과수원 길'의 앞부분이다.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화목의 동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황해도 황주가 고향으로 실향민인 박화목은 고향 마을의 과수원 풍경을 시에 그려냈다.

가곡 '보리밭'의 작사가이기도 한 박화목(1924~2005)은 50년 동안 서울 '문화촌'에서 살았다. 행정 명칭은 서대문구 홍제3동 279번지 일대로, 홍제역에서 세검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안동 하회마을 모양으로 홍제천이 둥글게 휘감아 도는 안쪽 마을이다. 지도를 보면 오래된 동네로서는 드물게 길이 직선으로 반듯하게 조성돼 있다. 인왕중학교 근처에 '과수원 길'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도심과 가까운 곳이 됐지만 과거에는 서대문 밖의 변두리로 자갈밭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는 도시의 외곽에 작은 크기의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형태의 국민주택을 공급했다. 이곳에도 1957년 무렵 국민주택을 지어 분양했는데 시내와 멀어 분양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인과 예술인들이 들어와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국민주택을 문화주택이라고도 불렀는데, 문화주택이 있는 지역을 흔히 문화촌이라고 했다. 다른 지방에서도 문화촌으로 불리는 곳을 찾아볼 수 있다. 홍제동 문화촌이 문화예술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문화촌에는 박 시인 외에도 시인 김관식, 극작가 이해랑 등 20명 가까운 문화예술인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문단의 기인으로 통하는 김관식(1934~1970)이 조성했다는 과수원은 홍은동 산비탈에 있었다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 홍은동에 인접한 부암동 백사실계곡에는 지금도 과수를 재배하는 '능금마을'이 남아 있기는 하다.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거나 살고 있는 마을은 더 있다. 서울 사당동에는 예술인마을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1969년 한국예총과 서울시가 예술인아파트를 지어 예술인들에게 분양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은 이름만 남았지 예술인들은 거의 떠났다. 그 대신 성북구 정릉동과 도봉구 쌍문동 등지에 예술인들을 위한 주택이 들어서 있다. 기자촌은 서울 진관외동에 있었는데 은평뉴타운에 흡수돼 흔적이 없어졌다.

홍제동 문화촌은 문화주택 단지만이 아니라 인근 인왕산 아랫동네까지 그렇게 불렸다. '개미마을'은 문화촌에 인접한 곳인데 재개발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1967년 인왕산 서편 아래에 대한주택공사(현 LH)가 문화촌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면서 광고(조선일보 1967년 10월 29일자·사진)를 냈다. 당시는 김현옥 서울시장이 시민아파트를 대대적으로 지어 분양하던 때다. 주공이 건설한 아파트는 흔치 않았다. 마포아파트도 주공이 지은 것이다.

광고를 보면 문화촌 아파트의 구조를 알 수 있다. 11개 동에 476가구로 10여평의 크기에 방 두 개와 화장실이 딸린 작은 아파트다. 분양가는 76만~78만여원이었다. 정릉에도 같은 시기에 같은 크기의 아파트 162가구를 지어 분양한 것으로 광고에 나와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수세식 화장실과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었으며, 개별 출입구로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고 광고했지만 바로 완판되지 않았다. 선착순 분양에 분할납부라는 조건에도 이듬해까지 미분양이 남아 있었다.

분양가가 당시 물가로 볼 때는 저렴하지도 않았고 프리미엄마저 기승을 부렸다고 당시 기사는 전한다. 또한 방 두 개짜리 구조는 대가족 시대였던 당시에는 생활에 적합하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의 서민 아파트들은 연탄난방을 하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등 구조적 문제점이 많았다. 그래도 주공아파트는 짧은 기간에 지어 붕괴사고도 일으켰던 시영아파트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었다. 문화촌 아파트는 2002년 재건축되어 문화촌 현대아파트가 됐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