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급하긴 급했나 보다. 아니면 무심했거나. 금융위원회가 가열하게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인센티브 중 하나로 던진 ‘감사인 주기적 지정제 면제’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다. '회계 투명성은 미끼가 돼도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알맹이가 빠졌다는 지적에 '방어용'으로 내놓고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 제도는 기업이 6년을 연달아 감사인을 자유 선임하면 다음 3년 동안은 금융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직접 지정해주는 제도다. 지난 2017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사태 이후 감사인인 회계법인과 기업 간의 유착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고심 끝에 도입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금융위가 이끌어왔다.
여기서 주기적 지정제가 ‘기업에 부담이 되니 유인책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은 맥락을 잘못 짚었다는 판단이다. 시장이나 업계에서 투자니, 비용이니 논쟁을 벌일 순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정책당국이 나서서 이런 식으로 판가름을 해선 안 된다.
제도 자체를 ‘불편한 것’으로 치부하고, ‘밸류업’만 잘 해내면 가점을 줘 이 굴레에서 빼내주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회계 투명성이 기업가치 제고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삼성전자도 조건만 제대로 맞춰오면 주기적 지정을 면제해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목적이 비단 기업의 주가순자산비율(PBR),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지표상 수치를 띄우는 데만 있진 않을 것으로 믿는다. 횡령, 배임, 미공개중요정보이용 등에서 얼마나 깨끗한 지도 기업가치를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다.
제도의 효과를 두고도 의견은 갈릴 수 있다. 다만, 회계사들이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 자유 선임으로 인해 서로 오래 알고 지내게 되면서 부득이 사적 관계를 맺게 되는 일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기적 지정제가 과도하거나 부족하다면 완화하거나 강화하면 될 일이다. 감사-피감사인 간의 붙어먹기를 경계하기 위해 안착시킨 제도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의 희생양으로 던져져선 안 된다. 금융위는 주기적 지정제에 따른 감사를 ‘잘’ 받기 위한 자금 혹은 인력 지원책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
오는 19일 선출되는 한국공인회계사회장의 어깨도 무겁다. 당장은 후보로 나온 3인 모두 금융위의 이 같은 방향성에 반대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임기가 시작되는 20일 이후 2년 동안 같은 입장이 유지되길 바란다.
taeil0808@fnnews.com 김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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