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가장 큰 하중도인 여의도에는 조선시대 전부터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는 잉화도·나의주·나의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양과 말을 방목하던 나지막한 산이 있었는데, 양말산(羊馬山)이라고 불렸다. 방죽이 없던 여의도는 큰비가 오면 어김없이 한강물이 넘쳐 흘렀다. 강이 범람하면 양말산은 머리를 살짝 내밀어 '나의 섬' '너의 섬' 하고 부르던 게 한자로 여의도가 됐다고 한다.
양말산 아래에는 500여가구 2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일제가 여의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활주로를 만든 것은 1916년이었다. 비행기가 발명된 직후이고 초창기 전투기들이 하늘을 날던 때의 군용 비행장이었다. 1922년 안창남이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에 나타났을 땐 서울시민 5만여명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들고 신기한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광복 후 여의도 비행장은 1960년 김포국제공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국제공항 역할을 했다. 외국을 순방하는 대통령이나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도 이곳에서 비행기 트랩을 밟았다. 한강철교에서 바라다보이는 여의도는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영등포도 지났는지 창밖으로는 불빛이 드물게 흘러갔다. 멀리 비행장 있는 쪽에서 서치라이트의 비단결 같은 빛살이 밤하늘을 스쳐가고 또 스쳐가고 있었다." 1962년 김승옥의 소설 '환상수첩'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주인공의 눈에 비친 여의도를 이렇게 적었다.
공항의 소임을 다한 여의도 개발에 착수한 이는 제24대 서울시장 김현옥이었다. 연인원 52만명을 동원해 7.6㎞의 윤중제를 완공, 2.9㎢의 물이 범람하지 않는 여의도를 만들었다. 그것도 단 100일 만이었다. 1968년 6월 1일 열린 준공식엔 박정희 대통령 등 3부 요인이 참석했고 박정희는 승용차를 타고 윤중제 도로를 달렸다.
윤중제를 건설하면서 김현옥은 여의도 개발 계획을 구상했다. 설계를 건축가 김수근에게 맡겼다. 김수근은 허허벌판 여의도에 개발계획도를 그렸다. 광고(조선일보 1968년 4월 7일자·사진)는 윤중제가 완공되기 전 건설 도중에 실린 조감도다. 그만큼 빨리 밀어붙였다. 광고를 보면 애초 김수근의 계획에는 국회의사당, 시청, 고층아파트, 민족광장, 박물관과 수족관, 공설운동장, 외국 공관 등이 들어설 것으로 돼 있다. 김수근은 공중 보행데크와 자동차 도로를 분리한 입체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다른 작품인 세운상가처럼 여의도를 입체도시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김현옥이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하면서 계획은 여러 차례 수정된다. 처음에는 대법원도 여의도로 옮길 계획이었다. 재설계를 맡은 박병주 교수는 김수근과 다르게 평면적으로 구성했다. 현재의 여의도 모습과 유사하다. 대법원을 신축하기로 했던 곳에는 시범아파트를, 동쪽 끝에는 종합병원을 그려 넣었다. 종합병원은 다시 바뀌어 63빌딩이 들어섰다.
박 교수는 처음에 공원형 광장을 중앙에 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본 박정희가 열병식과 비행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커다란 콘크리트 광장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박 교수의 설계도를 들고 보고하러 온 양 시장에게 "양 시장 이마만큼 넓은 콘크리트 광장을 조성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5·16광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광장이 만들어졌다.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기도 한 이 광장은 김대중 정부 때 여의도공원으로 변모했다.
박 교수의 설계도에 따르면 서울시청은 국회 바로 앞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강남을 포함해 여러 곳의 다른 후보지가 물색되다가 결국에는 현 위치를 고수했다.
국회 앞 서울시청 이전 계획지에는 한국산업은행이 대신 들어왔다. 당시 서울시의 관심은 여의도보다 강남 개발에 쏠려 있었다. 여의도를 통과할 계획이었던 지하철 2호선은 더 큰 원을 그리며 여의도를 비켜가 강남을 지나가는 순환선으로 변경됐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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