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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위기대응 수첩

[강남시선]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위기대응 수첩
전용기 금융부장
공무원과 수첩은 떼어놓을 수 없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더 그렇다. 대통령 주재 회의 때면 장차관은 물론 수석비서관들도 약속이나 한 듯 수첩을 꺼낸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또박또박 메모한다. 너무 자세히 쓴 탓에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대표적이다. 안 수석의 업무수첩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의 스모킹건(움직일 수 없는 증거) 역할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국회의원 시절 늘 수첩을 들고 다니며 꼼꼼히 메모해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업무수첩이 수첩공주의 탄핵을 이끈 셈이다.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실무자들과 회의할 때 꼭 수첩을 들고 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종 숫자들이 빼곡한 수첩을 펴서 실무자들의 의견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는다고 한다. '경청'이 몸에 밴 덕분인지 금융위 직원들 사이에선 신망이 높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공매도와 밸류업 등으로 이슈몰이를 할 때 상대적으로 비켜나 있는 금융위 직원들의 불만이 컸지만 '젊고 열정 있는 원장이 나서서 얘기하는데 좋은 것 아니냐'라고 다독였다는 후문이다.

사실 김주현 위원장은 금융위기 대응 경험이 풍부한 위기관리 전문가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을 맡아 최일선에 서 있었다. 그 때문에 현재의 고금리·고환율·고물가의 3고 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최근 김 위원장의 수첩에 적힌 가장 큰 관심사는 '서민' '자영업자'라고 한다. 3고 위기에 가장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위는 최근 '서민, 자영업자 지원방안 마련 태스크포스(TF) 1차 회의'를 개최했다.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금융감독원, 캠코, IBK기업은행 등 서민금융 관련 분야 유관기관도 총출동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정책서민금융 공급 확대, 선제적 채무조정 강화, 소상공인 자영업자 이자 부담 완화 등 다양한 정책 노력을 했지만 자영업자 여건이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실제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1·4분기 말 시중은행의 개인사업자 대출 연체율은 0.54%로, 2012년 4·4분기(0.64%) 이후 11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자영업자 등 취약차주에게 대출을 공급하는 저축은행은 오히려 대출문턱을 높이고 있다. 올해 1·4분기 기준 저축은행의 개인사업자 대출잔액은 18조4000억원으로 전년 23조4200억원 대비 5조원가량(21%) 감소했다. 연체는 늘어나고 돈 빌릴 곳은 점점 없어지면서 자영업자들은 한계상황에 몰리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자영업자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매장이나 프랜차이즈 계약기간이 남아 보증금을 바로 돌려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위약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폐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폐업도 돈 있는 사람 얘기'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이에 폐업도 못하는 '좀비 자영업자'와 폐업 결정으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자영업자가 함께 늘어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자영업자 부채를 포함한 민간부문의 부채가 정부부문으로 이전되면 경제위기가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위기에 민감한 김주현 위원장이 움직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17년 우리금융연구소 대표이사 시절 가계부채의 악영향을 지적한 '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Between Debt and the Devil)'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감독당국 수장이었던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이 담겼다.

최일선에서 2008년 금융위기를 맞섰던 김 위원장이 10년 뒤 번역서를 내며 다시 복기를 한 것은 '위기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디 이번에도 김 위원장의 위기대응수첩이 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 본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