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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도 부인한 범인… 배심원질문·檢심문에 "나 맞다" 인정

그림자 배심으로 본 참여재판
'묻지마 칼부림' 사건에 초점
배심원 만장일치 유죄 결정
정신병력 자료 부족 아쉬워

"캐리어에서 지문은 안 나왔나요?"

지난 12일 오전 11시 서울서부지법 303호에서 배심원 한명이 검사에게 질문했다. 법정에서 재생된 폐쇄회로TV(CCTV)엔 한 남성이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다. 피고인 최모씨는 새해 첫날 서울 마포교 동교로에서 일면식도 없는 20대 남성에게 과도를 휘두른 혐의(특수상해)로 기소됐다. 이날 재판은 최씨의 요청으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정식 배심원 8명(예비 배심원 1명 포함)이 재판에 참여했고, 기자를 포함한 10명이 '그림자배심원'으로 참가했다. 그림자배심원은 실제 배심원처럼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와 양형에 대해 토의한다. 다만 정식 배심원과 달리 재판부가 의견을 참고할 의무는 없다.

■피고인이 범인인가

이번 사건의 쟁점은 최씨가 실제 범행한 사람과 동일인인지 여부였다. 최씨는 앞선 공판에선 자신이 범행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배심원들은 검찰이 제시한 CCTV 영상을 보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영상에선 한 남성이 골목 쪽에 캐리어를 놓고 길가에 주차돼 있는 피해자의 차량으로 다가갔다. 이어 이 남성이 차량 속 피해자와 몸싸움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고, 피해자가 도주했다. 영상 속 가해자는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화면 속 가해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최씨 본인인지 여부를 식별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경찰은 가해자가 외국인이었다는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영상 속 골목에 있던 게스트하우스를 조사했고 그곳에 있던 최씨를 긴급체포했다.

배심원들은 현장에서 발견된 캐리어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지문이 나오진 않았는지 등을 물었다. 캐리어의 주인이 최씨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피고인 신문이 계속되면서 분위기가 기울어졌다. 수차례 공판에서 검찰이 최씨가 소지한 칼의 혈흔 등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이런 과정들이 최씨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 검찰이 "흰색 캐리어 끌고 가는 것이 피고인 맞나"라고 묻자 최씨는 "맞다"고 답했다. 최씨는 CCTV 속 남성이 자신이 맞고 자신이 주머니에 칼을 넣은 채 피해자에게 다가간 것이 맞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다만 칼을 직접 꺼낸 것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떨어져 그것을 집어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피해자가 놀라면서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취지였다.

■"조현병 자료 충분히 제공됐으면"

배심원 7명은 모두 최씨가 유죄라고 판단했다. 양형에 대해선 6명은 징역 3년, 1명은 징역 5년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최씨에게 배심원 의견과 마찬가지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정모씨(37)는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해 재판이 어렵게 흘러 갈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신문을) 계속 하다 보니까 모든 증거와 정황이 피고인을 향해 있었고 피고인도 인정하면서 혐의가 구체화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피고인의 조현병 전력보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라는데 초점을 맞춰 토의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조현병에 관한 자료도 충분히 제공됐으면 배심원들의 판단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도 냈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인이 형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토록 하는 재판으로 지난 2008년부터 시행됐다. 피고인이 신청할 경우에만 가능하며 미국 재판과 달리 배심원 평결에 대해 판사가 이를 따를 의무는 없다. 다만 배심원의 평결과 다른 선고를 할 경우에는 판사는 평결과 다른 선고를 한 이유를 판결문에 밝혀야 한다.

yesyj@fnnews.com 노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