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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파워 약화’가 아닌 ‘지정학 위기’로 흔들리는 美 패권국 위상 [fn기고]

 -반길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미국 군사·경제력서 부동의 1위, 피크 차이나 현실화로 격차 벌어질 수도
 -지정학적 위기, 美 소프트파워·패권 지위 발목...국제질서 수호에도 적신호
 -對이스라엘 정책 '이중 잣대 딜레마' 야기 ‘동맹’지키려다 ‘국제질서' 와해 우려
 -중동과 우크라이나서 다른 '레드라인 설정'... 모순은 美 소프트파워 훼손 단초
 -수정주의 국가들의 규칙 파괴 행위 정당화에 악용, 美 국내 정치에도 부정적 영향
 -예외 없는 규칙·원칙 준수 일관성 필요, 자유민주주의 견제·균형 작동 극복 기대

[파이낸셜뉴스]
 ‘하드파워 약화’가 아닌 ‘지정학 위기’로 흔들리는 美 패권국 위상 [fn기고]
반길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일각에서는 미국이 하드파워 측면에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패권국 지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규정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여전히 미국은 군사력, 경제력에서 부동의 1위다. 사실 패권지위 도전의 직접적인 추동체는 미국의 쇠퇴가 아니라 중국의 빠른 추격이다. 다시 말해 패권국 미국과 도전국 중국의 힘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 간의 힘의 격차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심지어 힘이 전이되는 상황까지 진행될까? 그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피크 차이나(Peak China)’ 담론이 현실화된다면 힘의 격차 축소는커녕 다시 격차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드파워 측면에서 미국이 도전국에 패권의 지위를 내어줄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미국이 상당 기간 그 위상을 유지할 가능성도 시나리오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소프트파워 측면에서도 미국은 국제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하드파워 약화’가 아니라 ‘지정학적 위기’가 미국의 패권 지위 유지에 발목을 잡고 있다. 복합위기 시대에 지정학적 위기는 특정 국가만의 도전이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는 도전이다. 그런데 이를 넘어 지정학적 위기가 미국의 소프트파워 위상을 흔들면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수호에도 적신호가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는 미국을 “이중 잣대 딜레마(Double Standard Dilemma)”로 내몰고 있다. 이 딜레마의 요체는 본질적으로 ‘동맹’을 지키려다 자칫 ‘국제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는 상황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동 및 무차별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지를 이어가고 있다. 가자지구 남단에 위치한 라파 난민촌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도 미국은 ‘라파 공세’가 자신이 정한 레드라인(Redline)을 넘어서지 않은 것이라며 이스라엘을 우회적으로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정한 레드라인은 ‘라파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라는 주장을 통해 사실상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입장을 봐주는 듯한 ‘높은’ 레드라인 설정은 미국이 두 개의 전장에서 다른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규탄을 이어가면서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무차별적 공격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하는 모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미국의 소프트파워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지키는 책임국가로서 미국에 대한 신인도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가치연대를 지향하는 유사입장국 협력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이중 잣대는 수정주의 국가들의 규칙 파괴 행위 정당화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려의 대목이다. 한편 ‘이중 잣대 딜레마’는 미국 국내 정치적으로도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이스라엘 경도로 인해서 미국 내에서 시위가 확산하는 것은 이중 잣대 딜레마가 사회적 혼란까지 초래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중 잣대 딜레마’ 해소를 위해서는 일방적인 동맹 두둔이 아닌 예외 없는 규칙·원칙 준수라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원칙이 상대방이 누구이냐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면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하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는 인류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수호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한편 미국 그 자체에서 처방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 요소다. 그 처방의 근원은 미국이 민주주의 선도 국가라는 점에 있다. 즉 그 딜레마를 야기시킨 국가의 정치제도라는 내부에서 ‘이중 잣대 딜레마’ 완화 해법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문제를 바로잡는 복원력에서 탁월하다. 지난 6월 4일 미 하원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체포영장을 청구한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제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행보는 ‘이중 잣대 딜레마’를 이어가는 행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이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제도와 절차에 기반한 정치 공식도 작동한다. 이 법안이 현실화되려면 상원과 대통령이라는 다음 단계를 모두 통과되어야 하는 프로세스는 문제를 바로잡는 기회를 제공하는 민주주의 정치공식의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불합리한 상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정치제도로서의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을 보여줄 시점이다. 이는 결국 ‘이중 잣대 딜레마’를 완화시키고 나아가 소프트파워 쇠락의 역학도 막아줄 것이다. 지정학적 위기가 패권국 미국을 흔들고 있지만 이를 극복할 기제를 미국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진행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리=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