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견이 끝난 뒤 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볼펜(기자용 만년필)을 프레젠트하고…." 신문기사에 나타나는 볼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연말 기자회견을 하고 나서 볼펜을 선물로 주었다는 내용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펜을 잉크에 찍어 글을 쓰는 게 보통이었다. 만년필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잉크를 머금은 펜을 쓰다 보면 잉크가 튀어 하얀 교복을 버리기 일쑤였으며, 잉크병을 엎질러 책과 옷을 퍼렇게 물들이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유성잉크를 저장하고 매끄러운 펜촉으로 글을 쓰는 볼펜은 가히 '필기구의 혁명'이었다.
펜 끝에 지름이 0.7㎜인 금속 공(ball)이 달린 볼펜을 발명한 사람은 헝가리 사람 라슬로 비로(1899~1985)다. 라슬로의 직업은 매일 많은 양의 글을 쓰는 기자였다. 이승만이 볼펜을 기자용 만년필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연유를 알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발명의 어머니는 불편이다. 쓰기 편한 필기구를 연구하던 라슬로에게는 화학자이던 동생 죄르지가 있었다. 형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그곳에서 볼펜을 발명, 특허를 획득하고 제품을 만들어냈다. 아르헨티나는 비로의 생일인 9월 29일을 발명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국산 볼펜이 처음 나온 것은 1963년이다. 그림 도구를 만드는 작은 기업으로 출범한 광신화학공업사가 생산했다. 1928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학과를 졸업한 송삼석이 창업한 기업이다. 송 창업주는 일본에서 문구를 수입해 판매하다 우리도 볼펜을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갖은 고생 끝에 볼펜 개발에 성공했지만 처음에는 잉크가 새어 나와 와이셔츠 값을 변상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반응이 냉랭했다. 단점을 해결하는 한편 송 창업주는 관공서와 기업을 돌아다니며 볼펜을 홍보했다. '모나미 153'이 국민 볼펜으로 올라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령에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던 송 창업주는 2022년 타계했고 지금은 장남 송하경이 경영을 맡고 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 몽 아미(내 친구)를 소리나는 대로 부른 것이다. 볼펜이 히트를 치자 회사명도 모나미로 바꾸었다. 처음 출시한 볼펜 한 자루 값은 15원으로 신문 한 부 값과 비슷했다. 신문팔이처럼 볼펜을 팔러 다니는 행상들도 있었다. 모나미 뒤에 붙은 '153'은 무슨 의미일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다'는 요한복음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고, 그냥 부르기 쉬워 붙였다고도 한다. 15는 값이 15원이라는 의미고, 3은 모나미가 만든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모나미 볼펜은 써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팔렸다. 모나미는 플러스펜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필기구 전문기업으로 발전했다. 여러 이벤트를 주최할 정도로 사세가 팽창했다. 연예인들을 모아 '스타의 밤'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73년 2월 15일자·사진).
이후에도 모나미는 승승장구했지만, 2819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2011년이 정점이었다. 원인은 익히 아는 대로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손편지를 쓰지 않듯이 볼펜 사용도 점점 줄었기 때문이다. 학령인구가 감소해 학생들의 볼펜 소비가 감소했다. 설상가상으로 값싼 중국산 필기구들이 밀려들어와 타격을 주었다.
매출은 급격히 하락, 지난해에는 1415억원까지 떨어졌고 10년 만에 적자를 냈다. 저렴하게 유지하던 볼펜 가격을 12년 만에 250원에서 300원으로 올렸지만 실적개선은 힘겨워 보인다.
필기구에만 전념하던 모나미는 사업 다각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본업과는 무관한 음료사업도 했다. 필기구를 생산하면서 익힌 색조기술을 살려 선택한 새로운 업종이 화장품이지만, 성공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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