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도쿄특파원
일본의 새로운 지폐가 3일부터 발행된다. 엔화 지폐 디자인이 리뉴얼되는 것은 20년 만이다.
1만엔권, 5000엔권, 1000엔권 등 3가지 신권이 발행된다. 1만엔권의 얼굴에는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가 낙점됐다. 기존에는 일본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이 들어가는데 40년 만에 교체되는 것이다. 기업인이 지폐의 인물이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또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1864~1929)가 새롭게 등장한다. 1000엔권은 일본 근대 의학의 기초를 놓은 기타자토 시바사부로(1853~1931)가 선정됐다.
이 중 한국과 연관이 큰 인물은 1만엔권의 주인공인 시부사와다.
시부사와는 일본 500여개의 기업과 기관을 설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도쿄가스, 제일국립은행, 도쿄증권거래소 등이 있다. 이 기업들은 일본 경제의 근간을 이루어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시부사와가 다른 경제인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그가 경제활동에 있어 윤리적 가치를 중시해서다. 그는 '논어와 주판'(論語と算盤)이라는 저서에서 "한 손에는 주판을 들고 돈을 많이 벌되 또 다른 손에는 논어를 들고 항상 윤리를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당시 다수와 조직의 이익에만 가치관이 매몰된 일본 사회에 경종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경제철학은 요즘 기업 경영의 화두가 되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과 맞닿아 귀감이 되고 있다.
신권 발행은 다시 일본 사회에 시부사와 바람을 불게 했다. 연일 신문에서는 그를 재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회장, 오카후지 마사히로 이토추 회장, 구리야마 히데키 전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 등이 인터뷰 기사를 통해 자신의 성공 뒤에 시부사와의 철학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시부사와는 일본 근대 경제의 아버지로서 대단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입장에서 볼 땐 뚜렷한 명암이 공존한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관련해 금융시스템 도입과 기업 경영의 현대화 등 그의 조언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일 양국 간의 경제적 협력의 기초가 됐다. 한국 입장에서는 시부사와의 경제개혁이 일본의 경제모델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역시 시부사와는 한반도 침략의 선봉자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기여한 한일 간 경제적 교류 촉진은 일본의 식민지 활성화를 위한 수단일 뿐, 과정은 불순했다.
당시 경제교류는 일방적인 착취로 이어졌고, 한국 경제는 일본의 하위 구조로 전락했다. 광복 이후에도 수십년간 한국 경제의 자립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부사와의 경제정책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옹호한다. 그의 시스템을 모방한 한국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취해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선 중소기업이 크기 힘든 불균형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1900년대 초 자신이 은행장이었던 제일국립은행이 대한제국에서 허가 없이 1~10엔 화폐를 발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해당 화폐에 본인의 얼굴을 넣어 한국에 치욕을 안겼다. 그는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일제강점기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사장을 맡아 경제침탈에 앞장섰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만엔권의 시부사와는 2019년 아베 정권에서 결정한 것"이라며 "이를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발행하는 기시다 정권도 문제가 크다. 역사를 수정하려는 전형적인 꼼수"라고 비판했다.
그의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달 7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을 여행한다. 1만엔짜리에 새로 새겨질 시부사와는 우리에겐 그런 사람이다.
km@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