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
1961년 KBS TV에 이어 1964년 TBC TV, 1969년 MBC TV가 개국함으로써 TV 3국 시대가 시작됐다. 금성사가 1966년 흑백TV 수상기를 최초로 개발했지만 TV는 한 동네에 한 대밖에 없을 정도로 귀했다. 프로권투 경기를 중계할 때면 다방이나 동네 전파사, 만화방으로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옛날 TV는 뒷부분이 튀어나온 '브라운관'을 사용했다. 브라운관은 발명자인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바라 방식으로 문을 좌우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궤짝에 넣은 제품도 있었다.
국산화 후에도 TV는 여전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부품은 외국산에 의존했고, 높은 '물품세'가 부과돼 사치품으로 인식됐다. 1969년 출시된 금성사의 최신형 모델 VC-195는 8만1000원대, VS-196은 8만9000원대였다. 당시 기사를 보면 5년차 공무원의 월급이 1만560원, 서울 시내 가구당 한달 생계비가 2만7270원으로 나와 있다. TV 한 대 값이 공무원 월급의 8배, 생계비의 3배였던 셈이다. 할부 판매가 보통이었고 은행에 가서 계약서를 쓰고 선착순으로 TV를 인수했다. 더뎠지만 TV는 점차 늘어났다. 1973년 100만대를 넘어섰고 1976년엔 260여만대로 증가해 2.4가구에 한 대꼴로 보급됐다. TV를 생산하는 기업도 여럿 생겼다. RCA, 내셔널, 도시바 등 외국산 TV들도 쏟아져 들어왔다.
가전과 TV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대한전선이다. 대한전선은 창업주 설경동(1901~1974)이 1955년 세운 기업이다. 평북 철산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운송업과 해산물 판매업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어선 70척을 소유하고 비행기로 물고기를 탐지할 정도의 재벌급 기업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 후 악덕 지주로 몰려 재산을 다 잃고 월남했다.
남한에서 설 창업주는 무역업과 부동산업, 성냥 제조업으로 곧 재기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의 수원 성냥공장이 시장 점유율 1위였다. 전쟁으로 또 한번 시련을 겪었으나 대한방직에 이어 적산기업 조선전선을 불하받아 대한전선을 설립했다. 케이블 제조업에서 더 나아가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 생산에 뛰어들었다(동아일보 1978년 10월 11일자·사진). 한때 가전업계 2위로 올라설 만큼 성공을 거뒀고 대한전선그룹은 재계 서열 5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1978년에는 경북 구미에 국내 최대 규모의 텔레비전 공장을 준공하고 즉석사진기인 폴라로이드 카메라 판권을 인수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금성과 삼성에 밀려 1983년 가전 부문을 대우그룹에 넘겨주기에 이른다. 현 위니아전자의 뿌리가 대한전선이다. 대한전선은 공중분해된 국제그룹과 연관이 있다. 창업 2세인 설원량 회장의 부인이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의 동생 양귀애씨다. 그후 전선업에 몰두하며 사업을 키워갔지만 금융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설씨 가문도 경영권을 내놓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지금은 호반그룹이 인수해 매출 3조원을 바라보는 계열사로 키워가고 있다.
1980년대에 컬러 방송이 시작돼 본격적인 '안방극장'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일본과 가까운 남쪽 해안지역에서는 그전부터 일본 TV 방송을 컬러로 볼 수 있었다. 부산이나 울산 등지에서는 위성안테나를 설치하고 일본 방송을 단속을 피해가며 시청했다. 더욱이 일본은 밤에만 방송을 하던 우리와는 달리 종일 방송을 했다.
외국산 컬러TV가 밀수로 들어왔고 1970년대 중반 부산지역에 컬러TV가 2만여대나 보급돼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75년 1월 23일자). 해운대나 송도 등 바닷가에서는 일본 방송이 더 선명하게 나왔다. 극동호텔 등 유명 호텔에는 고객들의 요구로 컬러TV를 비치해 두고 있었다. 한국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스포츠 경기 등이 중계될 때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호텔을 점거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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