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현 경제부장
오랜만에 족발을 시켜 놓고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껍질이 콜라겐이라고 했으니 먹어도 마치 살이 찌지 않을 것 같다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소주 한잔을 곁들이려던 찰나, 낮에 본 뉴스가 떠오른다. 경북 예천 돼지 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는 소식이다.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들고 잠시 고민에 빠져있자 가족들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 돼지고기, 과연 안전할까?' 내 안의 고민이 순간 요동친다.
돼지에 대한 질병이라면 흔히 '구제역'(FMD)을 떠올리는데 ASF는 전혀 다른 놈이다. 구제역이 감기라면 ASF는 흑사병 수준이다. 원래는 케냐의 풍토병이었는데(그래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은 대략 2007년쯤에 조지아에서다. 이후 유럽 여기저기를 휩쓸다가 2018년에 동아시아에 상륙했다.
이 녀석은 중국을 거쳐 동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캄보디아까지 내려갔는데, 우리나라에는 2019년 파주에서 처음 발견됐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은 멧돼지가 전파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피해가 없다는 게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이다. 감염된 돼지와 접촉하거나, 먹더라도 인체 전파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별거 아닌 거 아냐"라고 시큰둥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무섭고 어쩌면 몇년 안에 한반도에서 돼지를 아예 괴멸시킬지도 모르는 공포의 질병이다.
ASF는 현재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 발병하면 치사율이 100%에 이르는 1종 법정가축전염병이다. 한 마리만 걸려도 농장의 모든 돼지를 살처분해야 한다. 게다가 가열, 건조, 부패, 냉동에도 바이러스가 죽지 않고 야외에서도 6개월 이상 살아남는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감염된 돼지를 소시지로 만들어도 바이러스가 그 안에 살아남는다는 의미다. 한 번 발병하면 박멸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2019년 중국을 강타한 이 낮선 질병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0개월 만에 최소 1억마리 이상의 돼지가 살처분돼, 중국 양돈업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우리나라의 돼지 사육 규모는 약 1000만마리 조금 넘는 수준인데, 중국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한반도에서 국산 돼지는 아예 씨가 마르게 된다.
알게 모르게 ASF는 한국에 유입된 이후 꽤 많은 피해를 입혔다. 지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ASF 발병으로 인한 농가 피해보상액은 1500억원에 육박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국민 1인당 돼지고기 섭취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러나 2019년 이후 5년간 과연 얼마나 준비하고 대비했는지를 되돌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하다.
지금까지 우리의 ASF 대응은 '땜질식 처방'에 그쳤다. 발생 농장 살처분, 이동제한 조치 정도가 고작이었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멧돼지는 ASF의 숙주지만 우리는 소극적인 대책을 고수해 왔다. 지난 5년간 수렵 장려금을 대폭 인상하고, 포획 트랩을 대량 설치하는 적극적인 방역을 펼쳐왔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여유 있는 대응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백신개발 움직임도 해외에 비해 굼뜨다. 지난 5월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ASF 백신 개발을 위한 전용 연구시설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학계의 질타가 쏟아지기도 했다. 양돈농가의 방역체계도 바꿔야 한다. 방역에 투자하는 농가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수칙을 어기는 농가에 대해서는 과감히 폐쇄 조치를 내려야 한다.
국제 공조도 필요하다. 특히 중국, 북한과의 협력이 필수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지금이야말로 역설적 기회다.
ASF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것이 한반도 긴장 완화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ASF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식탁, 농가 생계, 국가경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다. 방역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경제부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