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약류 중독자에서, 이젠 마약류 퇴치에 앞장서는 '전두환 손자' 전우원씨 <상>
"외로움에 돌이킬 수 없는 길 갔다"
중 1때 미국으로 강제 유학길 떠나
타향살이 외로움 달래려 마약류 손대
대학 진학하며 마약류에 본격 노출
"난 사회에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
군복무중 잠시 끊었다가 다시 시작
직장생활땐 경쟁·실적 압박 시달려
환각증세·우울증 심해져 자살 시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가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파이낸셜뉴스빌딩에서 자신이 마약류 예방활동에 동참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마약류로 지옥을 경험해봤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저 혼자였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주변에서 손을 잡아줘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저처럼 마약류에 의존하며 도피하려는 누군가에게 저도 손을 내밀고 싶어요."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파이낸셜뉴스빌딩에서 만난 전우원씨(28)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4월 미국에서 라이브 방송을 켜고, 마약류를 투약하는 모습을 공개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현재 전씨는 약을 끊고 마약류 중독 예방활동에 나섰다. 은구(NGO)와 답콕(DAPCOC) 등의 예방단체 활동에 가면 전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이낸셜뉴스는 전씨가 마약류의 유혹에 빠지게 된 계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2회에 걸쳐 보도한다.
■입시 전 동급생이 내민 대마초
인터뷰 내내 전씨의 표정은 진지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것 같지만 삶이 녹록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의 손자였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아버지와는 거리감이 컸다고 한다. 미국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가 살았던 지역 주민은 대다수가 백인이었던 탓에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전씨는 "학창 시절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동급생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했는데, 기숙사에서 취침할 때조차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면서 "그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웠지만 미국 생활 15년 동안 딱 한 번밖에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인생에서 감수성이 가장 많았던 시기인 사춘기를 가족도 친구도 없는 채 홀로 버틴 셈이다.
대학입학시험(SAT)을 치르기 하루 전날 마약류의 유혹이 찾아왔다. 자신을 괴롭히던 백인 동급생들이 진원지였다고 한다. 전씨는 "그날 그 친구들이 저에게 모임에 참석하라고 해 이제 친구가 될 기회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까지 거기서 마약류를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모임 장소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퀴퀴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거기서 백인 동급생 한 명이 전씨에게 대마초를 권했다. 전씨는 대마초가 무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급생들이 내미는 대마초에 대해 동질감을 형성시켜주는 매개체로 인지하고 받아들였다"면서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지만 그때는 거부하기 너무 어려웠다"고 전했다.
■군에서도 금단현상 시달려
전씨는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 사립대학교 중 하나인 뉴욕대학교(NYU)에 진학했다. 여기서도 마약류의 유혹을 피해가지 못했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마약류 유통책이었다고 한다. 룸메이트가 엑스터시 등을 공짜로 줄 테니 한번 해보라며 권유하기도 하는 등 마약류의 유혹이 많았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주류사회에서는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대마초 등 마약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씨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는 성공적 취업 등을 위해 교내외 사교모임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대마초 등을 권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학부 1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수행했다. 이 약 2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약류를 끊게 됐다. 전문적인 치료를 병행하며 단약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전씨는 군 생활 동안 금단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전씨는 "훈련하는데 다른 애들보다 땀을 몇 배로 많이 흘리고 몸에서 악취가 났다. 몸에서 힘이 빠져 내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고, 인지능력도 저하돼 반응속도가 느려 업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며 "군대에 있을 동안 체력단련을 많이 하고 땀도 많이 흘리니까 약 2년 동안 자연스레 몸에서 마약류가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 더해
전씨가 다시금 마약류에 손대기 시작한 것은 학부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전씨는 학부 2학년 때부터 갖은 인턴활동을 하면서 경제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 덕에 졸업 후 유명 회계법인에 취직할 수 있었다. 비로소 심적 안정을 찾는가 싶었지만 매일매일 동료들과 경쟁하며 실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커진 데다 아버지와의 거리가 더 벌어지면서 끝내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한 한국계 미국인 여성과 교제하게 됐는데, 교제 상대로부터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LSD)를 추천받았다. 처음에는 반감을 품었다.
마약류에 익숙한 미국 사회에서도 LSD는 그 위험성이 강해 기피되는 약물이었기 때문이다.
전씨는 "나날이 우울증이 심해져 가는 상황에서 LSD가 가진 강한 환각작용이 처음에는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면서 "다만 마약류는 어떤 종류이든 뇌가 망가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고,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고 전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그는 "주변 환경 때문에 내가 마약류를 어쩔 수 없이 접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고 싶지는 않다"면서 "다만 마약류 중독도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회복 과정에서도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kyu0705@fnnews.com 김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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