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좌측 어진)은 젊어서부터 등과 허리가 굳어지고 아픈 증상으로 죽을 때까지 고생을 했다. 그러한 내용이 <세종실록>(우측)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왕위를 셋째 왕자인 충령대군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태종은 사냥을 좋아해서 51세의 나이에 돌연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에도 끊임없이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세종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싫어했다.
1418년 세종 즉위년 가을에 태종은 세종과 함께 사냥을 나섰다. 세종은 20세이면서도 몸이 비만하고 동작이 느리고 날렵하지 못해서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세종 몰래 영의정에게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몸이 비만하고 무거우니 마땅히 때때로 밖으로 나와서 몸을 노니셔야 할 것이오. 문무(文武)에 있어서 어느 하나에 치우쳐 다른 하나를 가벼이 할 수는 없는바, 나는 조만간 주상과 더불어 군사훈련용 사냥대회를 치르고자 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상왕인 태종은 어떻게든지 세종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움직이게 하고자 했다. 체질로 보면 세종은 태음인에 가까웠다. 세종은 몸이 비만하고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대신 방안에서 앉아서 책읽기를 좋아했고 육식을 즐겼다. 그러니 살은 점점 더 쪘다.
1431년(세종 13년) 세종이 33세가 되던 여름, 세종은 날이 더워 경복궁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쪽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다. 마치 고황(膏肓)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었다. 통증은 다음날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더니, 4~5일이 지나서 또 찌르듯이 아팠고 이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통증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등과 허리에 통증이 나타나면서 뻣뻣해지면서 고질병이 되었다.
세종의 등과 허리가 뻣뻣해지는 증상을 의관들은 ‘풍질(風疾)’로 진단했다. 의관들은 침구치료나 약물처방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의관들은 세종에게 온천욕을 권했다. 그래서 임시로 궁 밖의 온천 근처에 행궁(行宮)을 지어 일정 기간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1435년(세종 17년) 세종이 37세가 되는 음력 4월 어느 날, 세종은 허리가 아파서 명나라 사신을 환송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은 도승지에게 “내가 몸이 좀 좋아지는 듯 하더니 요즘에 들어서 허리와 등이 굳고 꼿꼿하여 굽혔다 폈다 하기가 어렵다. 작년에도 나와 동궁 모두 몸이 불편해서 진양대군이 대신해서 잔치상을 마련했는데, 올해도 역시 진양대군에게 대신 송별잔치를 베풀게 해야 할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명나라 사신들의 환송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지라도 마땅히 사신들을 접견해서 작별을 고하는 것이 예(禮)라고 청했다.
“만일 평상시대로 회복되지 않으시면 오늘이라도 미리 작별을 고하시고, 만약 내일이라도 좋아지신다면 친히 송별연에 참석하시는 것은 해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다행히 세종의 증상은 조금 나아져서 태평관에서 사신들에게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별연에는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세종은 오랫동안 않았던 소갈병(消渴病)과 풍습병(風濕病)이 점차 심해졌다. 심지어 세종 1441년(세종 23년) 43세 되던 봄에 이르러서는 안질(眼疾)까지 생겼다. 세종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통증이 생기고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 신하들은 세종이 어떤 일이든지 부지런하고 글과 법전을 밤낮으로 읽는 것을 좋아해서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온천욕을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세종은 인헌왕후와 함께 한동안 온천 행궁에 머물렀다.
세종은 온천욕을 하면서 등과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고 눈도 밝아져서 흡족해 했다. 어느 정도 기간동안 온천 행궁 기거를 끝내고 환궁을 하는 도중에 안여(安輿, 왕의 가마)를 탔다. 그런데 가마꾼들이 안여를 매고 걸을 때마다 충격이 온 허리에 집중이 되었다. 온천욕으로 좀 부드러워진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마치 허리에 뻣뻣한 마른장작 한 개가 들어서 있는 듯했다. 환궁을 한 세종은 장영실을 불렀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내가 등뼈와 허리가 안 좋다는 것은 이미 알 것이다. 그런데 가마꾼들이 가마를 매고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하다. 따라서 내가 타는 안여를 고쳐야겠다. 허리에 오는 충격을 가마가 흡수해서 허리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고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장영실은 “시간을 좀 주신다면 소인이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장영실은 안여 자체가 탄력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서 낭창낭창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여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무들을 너무 단단하게 고정을 하면 안되었다. 장영실은 여러 번의 실험을 반복했다. 가마꾼들이 시험삼아 안여를 매고 걷자 안여가 춤을 추든 위아래로 낭창거렸다. 성공이다. 세종의 명을 받든지 수 개월 만에 드디어 새로운 안여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안여가 만들어진 다음 해 1442년(세종 24년) 음력 3월, 세종은 행차를 떠나게 되었다. 세종은 이때 장영실이 새로 만든 낭창거리는 안여를 처음 탔다. 그런데 아뿔싸 충격을 흡수하게 하기 위해서 낭창거리게 만든 안여가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안여 안에 타고 있던 세종은 안여와 함께 내동이 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 허리 때문에 고친 안여 때문에 승하할 뻔 한 것이다. 의금부에서는 장영실을 데려다가 국문(鞫問)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은 죄가 없다. 내가 장영실에게 안여를 너무 딱딱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죄라면 점점 굳어가는 내 허리와 등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장영실을 풀어 주도록 했다.
1449년(세종 31년) 세종의 나이 51세, 시간이 흘러 다행스럽게 안질은 모두 나았다. 그런데 오른쪽 다리는 증상이 가벼워지는 듯 했지만 왼쪽 다리가 다시 아파졌다. 이제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거할 때면 반드시 신하들이 곁에 부축해야 했다. 세종은 온천욕을 하고자 했지만, 한 겨울이라 궁 밖으로 함부로 거둥할 수가 없었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 행궁을 짓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다.
세종은 결국 다음 해 2월, 52세의 나이로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세종의 허리와 등이 굳어지고 다리까지 번갈아 가면서 아픈 증상은 강직성 척추염을 앓았던 것 같다. 강직성 척추염은 주로 허리통증과 뻣뻣하고 강직된 허리증상이 주가 되지만 엉덩이 통증, 팔다리 관절통, 발꿈치 통증이 나타난다.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으로 비만, 과로나 스트레스 또한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
의관들이 풍질(風疾)이라고 한 것도 강직성 척추염을 대변한다. 풍(風)이란 병명은 갑자기 생기거나, 경련과 떨림이 있거나, 뻣뻣하게 굳어지는 경우에 붙인다. 경련성 마비를 일으키는 파상풍(破傷風)이 그렇다. 심한 통증이 동반되는 관절통에도 풍(風)자를 붙이는데, 통풍(痛風)이나 백호역절풍(白虎歷節風)이 있다.
또한 세종이 40대에 이르러 생긴 안구통과 시력저하는 강직성 척추염에 합병된 포도막염과 관련된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항간에 세종의 안질을 소갈병에 의한 당뇨병성 망막증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당뇨병성 망막증에는 안구통이 나타나지 않는다. 포도막염 또한 자칫 실명할 수도 있는 심각한 질환이지만 세종은 다행스럽게 회복되었다.
* 제목의 〇〇〇 〇〇〇은 ‘강직성 척추염’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세종실록> ○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9일. 上從上王, 田于雞山. 京畿都觀察使徐選來謁, 上王命: “自後觀察使勿見上王.” 嘗使河演諭政府, 六曹曰: “主上不喜游田, 然肌膚肥重, 須當以時出遊節宣. 且文武不可偏廢, 我將與主上講武.” (임금이 상왕을 따라 계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경기도 도관찰사 서선이 와서 알현하거늘, 상왕이, “이 후부터 관찰사는 와서 알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왕이 일찍이 하연으로 하여금 정부와 육조에 유시하기를,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고 하였다.)
○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遂引見宗瑞曰: “予得風疾本末, 卿必不知. 曩在景福宮, 方暑亭午, 暫御小樓, 當窓乍睡, 忽覺兩肩間刺痛, 翌日平復, 隔四五日又刺痛, 經宿微腫. 自此以後, 發作無時, 或經二三日, 隔六七日, 至今不絶, 遂成宿疾. 三十年前所御帶皆闊, 是知腰之減圍也. 중략.” (드디어 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이 되었다. 30살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중략.”라고 하였다.)
○ 세종 14년 기미(1432) 9월 4일. 傳旨承政院: “予比年以來, 風疾纏身, 中宮亦患風證, 多方攻治, 常不見效, 嘗欲浴于溫井, 恐其煩民, 默不敢言者有年. 乃今病候續發, 欲於明春幸忠淸道 溫水, 其議弊不及民之策以啓. 후략.”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내가 근년 이후로 풍질이 몸에 배어 있고, 중궁도 또한 풍증을 앓게 되어, 온갖 방법으로 치료하여도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온정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백성을 번거롭게 할까 염려되어 잠잠히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이제는 병의 증상이 계속 발생하므로 내년 봄에 충청도의 온수에 가고자 하니,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을 계책을 의논하여 아뢰라. 후략.”라고 하였다.)
○ 세종 17년 을묘(1435) 4월 1일. 上將餞使臣, 幸太平館, 下輦于御室, 命都承旨辛引孫曰: “予在宮中, 小有違和, 然謂可行禮, 今到此, 腰背硬直, 難於屈伸. 去歲崔使臣回, 予與東宮竝違和, 命大君代宴, 今亦依此, 欲令晋陽大君 瑈代宴. 其坐次, 使臣面南, 大君向西何如? 與政府六曹議之.” 중략. 上卽詣館, 與使臣辭別而還, 命晋陽大君 瑈代行餞宴. (임금이 장차 사신을 전별하려고 태평관에 거둥하여 연에서 내려 어실에서 도승지 신인손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궁중에 있을 때에는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는 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지금 여기에 와서는 허리와 등이 굳고 꼿꼿하여 굽혔다 폈다 하기가 어렵다. 지난해에 최 사신이 돌아갈 때에 나와 동궁이 모두 편치 못하여, 대군에게 명하여 대신 잔치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이 예에 의하여 진양 대군 이유로 하여금 대신 잔치하려 하는데, 앉는 차서는 사신은 남쪽으로 향하고, 대군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떠한가. 정부, 육조와 더불어 의논하라.”하였다. 중략. 임금이 곧 태평관에 나아가서 사신과 작별하고 환궁하여, 진양 대군 이유에게 명하여 대신 전별연을 행하였다.)
○ 세종 23년 신유(1441) 4월 4일. 都承旨趙瑞康等問安, 上曰: “予兩眼昏花澁痛, 自春以來陰暗之處, 非杖難行. 自浴以後, 亦無見效, 至前夜則披閱《本草》細注, 亦可見也.” (도승지 조서강 등이 문안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본초서의 잔 주석을 펴놓고 보았는데도 또한 볼 만하였다.
”라고 하였다.)
○ 세종 24년 임술(1442) 3월 16일. 大護軍蔣英實監造安輿, 不堅緻折毁, 下義禁府鞫之. (대호군 장영실 이 안여를 감조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 31년 기사(1449) 12월 3일. 上謂河演, 皇甫仁, 朴從愚, 鄭苯, 鄭甲孫曰: “予之眼疾則已矣, 語澁稍輕, 至於右脚之疾亦差, 卿等所知也. 近左脚亦痛, 起居必須人扶, 心有所思, 必驚悸. 중략. 其時予甚怪之, 今左脚之疾, 有時念之, 不覺氣乏, 久之乃平, 昔日可怪之事, 至於吾身矣. 朴堧, 河緯地浴溫泉乃差, 卿等亦有沐浴而離病者乎? 予亦浴于溫泉.” (임금이 하연, 황보인, 박종우, 정분, 정갑손에게 이르기를, “나의 안질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의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 등이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기거할 때면 반드시 사람이 곁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두근거리노라. 중략. 그때에 내 매우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왼쪽 다리가 아픔에 때로 이를 생각하니, 기운이 핍진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오래 되어서야 평상으로 회복되고는 하니,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노라. 박연, 하위지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하노라.”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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