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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악성 지라시 단속, 엄포 말고 성과를

[강남시선] 악성 지라시 단속, 엄포 말고 성과를
김병덕 증권부 부장
#1. '받)*** 분식회계 및 한정의견설'. 올해 상반기 주식시장에 돌았던 지라시 가운데 하나다. 14글자에 불과하지만 상장폐지라는 단어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내용에 해당 기업 주가는 당일 하한가 직전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회사 측이 "악성 루머일 뿐"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주가는 감사보고서가 나온 3월 하순까지 '지라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 '받) 메이저 걸그룹 마약혐의 의혹…○○○○ △△△ 기사 나올 예정이라고'. 지난해 10월 돌았던 지라시다. 활동중단까지 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내용에 해당 걸그룹의 소속사 주가뿐만 아니라 엔터주 전체가 급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소속사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고, 실제로 해당 아티스트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주식투자자들은 정보에 민감하다. 매일매일 바뀌는 주가의 움직임에 '나만 모르는 어떤 정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항상 안고 산다. 주가가 급등할 때나 급락할 때나 종목 게시판에는 '도대체 오늘 주가가 왜 이러나요'라는 질문이 빠짐없이 올라온다.

주가의 변동성을 키우는 재료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니 마치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맨몸으로 서 있는 듯한 심정이다. 이처럼 정보에 민감한 주식투자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것이 '지라시'다.

온갖 정보 지라시가 난무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악성 루머들이다. 특히 첫 번째 사례의 경우 개장 직후 지라시가 돌면서 그날 하루 외국인과 기관이 150억원 가까이 주식을 팔아치우기도 했다. 개인투자자보다 정보에 앞선다는 기관과 외국인도 사실이든 아니든 '찜찜하니 일단 팔자'는 분위기가 작용했던 셈이다.

혹자는 주가 급락을 이용해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지라시를 유포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비슷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올해 상반기에만 루머에 시달리다 '사실무근'이라는 회사 측의 해명을 낸 상장사가 두자릿수를 훌쩍 넘는다. 지라시 공격을 받은 기업의 주가는 급락했고, 불안한 투자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매도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루머가 난무하고, 주가는 급락하고, 투자자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금융감독원이나 한국거래소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주식시장에서 돌아다니는 일종의 해프닝 중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급기야 재계 2위 그룹까지 지라시의 타깃이 됐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건강이상설이 돌았던 지난달 14일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주가는 요동쳤다. 확인되지 않은 지라시 하나에 현대모비스 주가는 장중 14%까지, 현대글로비스는 장중 11.92% 치솟았다. 현대모비스가 장중 사실무근이라는 공시를 낼 정도였다. 현대모비스 주가는 아직 당시의 고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감원과 거래소는 지난 2022년 10월 증권사, 건설사 부도 등 루머가 확산되자 '합동루머 단속반'을 설치했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나 허위사실로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고, 투자자의 피해 및 자본시장의 신뢰도 저하가 염려된다는 이유다. 지난해 4월 일부 저축은행의 지급정지설 지라시가 돌고 난 뒤에는 '합동루머 단속반'을 업권별로 확대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감독당국의 대응은 악성 지라시 유포자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 열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악성 지라시를 만들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포다. 하지만 효과는 없어 보인다. 대주주 지분매각설, 대규모 적자설 등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는 악성 지라시가 올해 증시에도 난무했다.

무엇보다 악성 지라시 유포자를 잡았다는 소식이 없다.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특정 종목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도 악성 지라시 유포자들을 웃게 만든다. 감독당국 스스로가 그저 지라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지금은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다.

cynical73@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