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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의 세상만사] 제헌절,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생각한다

제헌의원들은 '적어도' 상상 못한 정치 난장판
격론 벌이던 교육 조항에 '적어도' 세글자 넣어 융통성 발휘
제헌헌법 곳곳에 설득과 양보의 흔적… 지금은 퇴장·강행뿐
생산성 저하 우려 공휴일 제외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명분
헌법 제정·공포 의미 되새기는 특별한 날로 인식하도록 해야

[노동일의 세상만사] 제헌절,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생각한다
주필
#제헌절 : 대한민국의 설계도

1948년 5월 31일 개원식을 연 제헌의회는 헌법 제정을 가장 큰 소임으로 꼽았다. 6월 1일 만들어진 '헌법기초위원회'가 17차례의 회의 끝에 전문과 102개 조항으로 된 초안을 완성한 것은 6월 22일. 20일간의 치열한 논쟁과 수정을 거쳐 헌법안이 7월 12일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된다. 신생 대한민국의 설계도가 모습을 드러낸 '제헌절'이다.

'헌법의 순간'(박혁, 페이퍼로드)은 '대한민국을 설계한 20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제헌절에 맞춰 발간된 책에서 저자는 20일 동안 가장 논란이 된 조항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헌국회회의록'의 광맥에서 발굴한 '오래된 보물'이다. 대한민국 국호 논쟁, 기본권의 주체가 '국민'인지 '인민'인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둘러싼 혈투 등 제헌의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교육조항과 민주주의의 모습

제헌헌법 중 교육 조항은 특히 흥미롭다.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제16조 교육 관련 조항의 일부이다. 여기서 '적어도' 문구는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다. 법률적 용어로 적절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우여곡절과 사연이 있다.

기초위원회 원안에는 '적어도' 부분이 없었다. 제1독회에서 반대의견이 속출했다. 박순석, 장면 의원은 왜 초등교육만 의무교육인지, 황호현 의원은 무상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따졌다. 유진오 전문위원은 어려운 나라 형편을 들어 의무교육은 초등교육에 한하며, 무상은 수업료 면제만을 의미한다고 답변했다. 현실론이었지만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강령에는 '건국 시기의 헌법상 교육의 기본원칙' 부분에서 "6세부터 12세까지의 초등 기본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 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함"이라는 조항이 있다. 지방별 각급 학교 수립, 교과서의 국영 발행과 무료지급 등과 함께 당시로서는 의무·무상교육에 관한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교육에 관한 제헌의원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제2독회에서 주기용 의원 외 49인, 최태규 의원 외 11인, 김경도 의원 외 16인, 홍순옥 의원 외 12인, 조국현 의원 외 10인이 수정안을 제출했다. 수정안 제안 설명에 나선 주기용 의원이 기발한 제안을 내놓았다. 조항 전체를 수정하는 대신 초등교육 앞에 '적어도'라는 석 자를 넣자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을 초등교육에 한정하면 헌법을 수정하기 전에는 의무교육을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 '적어도' 그 석자를 넣으면 (…) 장래 우리의 국력과 민도가 향상될 때에는 법률로서 간단하게 의무교육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올시다."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을 주장한 조국현 의원은 주 의원에 동조하며 수정안을 철회하였다. 현행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는 조항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헌법 대신 교육기본법 개정을 통해 "6년의 초등교육과 3년의 중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라는 융통성을 발휘한 제헌의원들의 지혜 덕분이다. 토론 과정에서 보여준 제헌의원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기대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치열한 토론과 대립을 양보와 타협을 통해 결실로 이끄는 게 민주주의 정신 아니겠는가.

#제헌절을 공휴일로

제헌절은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국경일로 지정된 후 1950년부터 법정 공휴일로 기념해 왔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식목일과 제헌절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주 5일 근무제 확대로 생산성 저하가 우려된다는 명분으로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제헌절이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은 아닌 이유이다. 국경일 중에서도 제헌절은 광복절과 함께 가장 격이 높아야 할 기념일이다. 하필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한 처사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휴일 제외 당시부터 반대 목소리가 있었고,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 움직임은 역대 국회에서 계속되었다. 제19대 국회(전병헌, 황주홍 의원 등), 제20대 국회(한정애, 윤영석 의원 등), 제21대 국회(윤호중, 박완수 의원 등)에서 '공휴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한 바 있다.

최근에도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의원과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법률안이 발의되었다. "제헌절을 공휴일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가질 수 있게 해준 헌법의 공포를 기념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공포의 의미를 기념하고, 국민의 휴식권 보장을 도모하려는 것"을 제안 이유로 들고 있다. "국민 10명 중 8명 가까이 제헌절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것에 찬성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정부는 최근 월요일 공휴일 등 대체휴일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생산성 저하라는 명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통해 완전한 국가경축일이자 모든 국민이 함께 기릴 수 있는 기념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

다시 제헌헌법 교육 조항으로 돌아가자. 김경도 의원은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은 각 지역의 수요에 응하여 시설의 균형을 기하여야 한다"는 수정안을 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의견은 관철되지 않았지만 김 의원의 발언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느낄 수 있다. "이 조항을 넣어야만 도시로만 몰리고 농촌을 이탈하는 폐단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 교육 시설 면을 제16조에 넣지 아니하면, 농촌 사람이나 지방 사람은 도저히 교육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다시 역설하는 바입니다."

'지방소멸'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현재 우리나라 형편을 훤히 보는 듯한 예견이 아닐 수 없다. 교육 시설 조항을 넣었으면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교육은 백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경구를 충실하게 따르려 한 진심이다.

조봉암 의원은 교육 조항이 확정된 후에도 '무상으로 한다'는 의미의 헌법 정신을 재차 강조했다. 무상이란 의무교육을 국가가 완전히 책임진다는 의미라는 점과 경제상황이 나아지면 의무교육을 전면 무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약속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헌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기록에 남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헌의원들의 뜻은 완벽한 헌법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새로운 나라의 길잡이가 될 헌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뜻이 제대로 관철되지 못한 경우라도 아쉬움을 넘어 치열한 토론 끝에 남겨진 간단한 조문에 담긴 정신이 무언지를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하고 있다. '좋은 헌법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박혁 저자는 고백한다. 지금까지 제헌의원들을 무시해왔고, 그들이 만든 제헌헌법을 제대로 된 헌법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걸.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만든 졸속 헌법이라 하찮게 여기고, 시대에 뒤떨어진 고문서라고 낮잡았으며, 다른 나라 헌법을 짜깁기한 모방헌법이라고 얕잡아 보았다. 우연히 마주친 헌법의 순간, 제헌국회 회의록을 찬찬히 보면서 느낀 감정을 토로한다. "제헌의원들이 들려준 생생한 목소리와 그들의 생각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얼마나 진지하고 활기에 넘치던지요! 간절함과 의지가 빚은 광경이 제 심장을 두드렸습니다. 상대를 설득하고 논박하는 언변과 논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순간은 말 그대로 '정치의 향연'입니다. 그 향연이 가슴을 뛰게 하고, 가슴 속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은 저자만의 몫이 아니다. 좁게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부터 넓게는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지금껏 제헌절이 있어 왔지만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메디슨 등 헌법 제정을 포함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공부해 온 건 아닌지. 지금도 헌법 제정 '당시의 의도(original intent)'를 논하는 미국에 비해 헌법을 처음 만들던 제헌의 정신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진 적은 있는지.

'정치의 향연'은 더욱 아쉽다. 저자는 이렇게 기술한다. "설득과 양보의 흔적은 더 진합니다. 일분일초가 아깝지만, 서로를 설득하는 데 온 전력을 다합니다. 지식과 경험은 부족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성실히 전하려고 애씁니다. 인내하고 경청합니다. 상대가 죽을 만큼 미워 험한 말도 하지만, 끝내 사과도 합니다.
끝을 모를 갈등 속에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꺼이 양보와 타협을 합니다." 토론 대신 삿대질과 욕설이 난무하고 협상과 타협 대신 퇴장과 강행처리만 남은 국회를 바라보며 제헌의원들이 전하는 헌법의 정신은 더욱 긴요하다. 정치가 사라진 제76주년 제헌절. 우리 헌법의 제정자들, 헌법의 아버지들을 기리면서 정치의 복원을 염원하는 날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dinoh7869@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