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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SMR의 쓸모

기후 위기와 산업 급변기
탄소 제로, 전력효과 주목
기술, 인재 투자 서둘러야

[최진숙의 기술빅뱅] SMR의 쓸모
최진숙 논설위원
"그들은 우리를 무서워했다. 우리는 어딜 가나 특별취급을 받았다. 체르노빌 사람들, 체르노빌 어린이, 체르노빌 피난민으로 불렸다. 나는 어린 딸을 데리고 민스크에 사는 여동생 집을 찾아갔지만 동생은 우리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딸과 나는 기차역에서 잤다."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노벨문학상 수상)가 쓴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나오는 주민 이야기다.

체르노빌 참사는 1986년 4월 26일 새벽에 발발했다. 구소련 우크라이나 지역의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 전기기사가 핵분열 제어봉을 제거하고 비상 노심 냉각장치를 차단한 채 테스트를 하다가 방사능이 누출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1분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두 번의 대폭발이 있었다. 방사능 낙진은 60%가 벨라루스 땅에 떨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유럽의 원전은 서서히 멈춰 선다. 강력한 원전 보유국이었던 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탈원전을 선언했다. 독일의 행보는 극적인 순간을 거듭했다.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총리의 연립정부는 원자력폐지법까지 만들어 탈원전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어 집권한 메르켈 총리는 달랐다. 메르켈은 라이프치히대 물리학 박사 출신이다. 에너지 안보, 탄소중립, 부진한 재생에너지 보급력의 현실적 문제 앞에서 결국 원전 유지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터진 것이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다. 직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하고 다시 원전 폐기로 돌아섰다.

원전 종주국 미국은 다른 길을 갔다. 1953년 세계 첫 원전 가동 이후 지금까지 대형사고는 세번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고에 앞서 1979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가 있었다.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파열됐지만 가압경수로형 원자로를 둘러싼 1m 두께의 격납용기 덕분에 피해가 미미했다. 미국은 안전대책을 대폭 강화하면서 동시에 대대적 진흥책을 내놓는다. 원전부지 관련 규제와 절차를 대폭 줄인 조지 부시 행정부의 '원자력 2010계획'이 여기에 속한다. 오바마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원자력 비중을 더 늘리는 정책을 내놨다. 바이든 대통령은 원자력을 탈탄소 전력에 포함시켰다. 다시 글로벌 원전 회귀 물결이 거세지고 있는 지금 미국은 강력한 원전패권을 노리고 있다.

돌아보면 가속화된 기후위기, 에너지 안보 리스크가 재앙의 원흉처럼 여겨졌던 원전을 살려냈다. 원전기술로 시대의 난제를 풀 수 있다고 자신한 미국 빌 게이츠의 생각은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했다. 수년 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한 것이 탄소제로 목표다. 이를 위해 태양광, 풍력 등 이미 보유한 수단들은 더 빨리 더 현명하게 사용할 것 그리고 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출시할 것('빌 게이츠의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그러면서 가리킨 것이 소형모듈원자로(SMR)다.

SMR 구상은 1980년대부터 있었다. 대형원전의 효용성에 밀려 진전이 없다가 2000년대 이후 주도권이 민간으로 옮겨가면서 급부상했다. SMR은 부피가 상용원전 대비 100분의 1 이하이다. 모듈 조립 방식이고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 주변기기가 일체형이어서 안전성도 한수 위다. 그래서 4세대 원전으로 불린다. 전력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공지능 혁명기 SMR을 최대 수혜주로 꼽는 이도 많다. 데이터센터의 좁은 공간에서도 활용 가능하다. 이런 쓸모들이 원전 공포를 이기고 있는 것이다.

세계 SMR 업체 선두는 2007년 설립된 미국의 뉴스케일, 이듬해 빌 게이츠가 세운 테라파워다. 우리 측에선 두산에너빌리티, SK그룹, HD현대 등이 뛰고 있다. 다들 2030년 상용화가 목표다. 우리는 원자력 불모지에서 원전 수출국이 된 기적의 역사가 있지만 설계기술, 인적 인프라는 여전히 열세다.
국가역량이 더 뒷받침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아이디어에 투자하기를 꺼리지 말 것. 미친 아이디어에도 투자를 해야 최소 한두 개의 기막힌 혁신을 얻을 수 있다." 빌 게이츠의 조언이 솔깃하다.

jins@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