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유일무이 '전세' 운영국..."주거 아닌 투자"
가격 하락기 투자 수익↓...주거불안 촉발
월세 전환 유도 쉽지 않아...'레버리지 폭탄' 감수중
안젤리나졸리(Angelina Jolie) ⓒ 로이터=뉴스1 ⓒ News1 안은재 기자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아들 매덕스가 우리나라 대학에 진학한 것이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매덕스의 자취를 위해 광화문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안젤리나 졸리가 전세제도를 이해할 수 있을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죠. 미국인 입장에서는 보증금을 내고 자기 집처럼 남의 집을 쓰다가, 계약 기간이 끝나면 고스란히 돈을 돌려준다는 개념이 이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시장논리에 비춰보면 다소 납득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는 대전제를 무시하고 언뜻 세입자에게만 한없이 유리해 보이기도 합니다.
전세를 이해하려면 제도의 틀을 '주거'에서 '투자'로 갈아 끼워야 합니다. 안젤리나 졸리 역시 우리나라 아파트 가격 추이를 들여다 봤다면 금방 'OK'를 외쳤을 지도 모릅니다.
'부동산 불패'가 만든 기형적 제도
한 푼도 빠짐없이 돌려줄 돈을 받고 2년간 집을 빌려주는 집주인의 심보는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보증금을 내는 대상은 '집주인'이 아니라 '투자자'에 가깝습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집주인이 한 번도 살지 않았던' 방을 둘러보게 됩니다. 애초에 집을 구매한 사람의 목적이 주거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전세보증금은 2년 후 돌려줘야 할 빚이지만, 집값이 계속해서 빠르게 올랐기 때문에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6월 기준 우리나라의 아파트의 전국 평균 전세가율은 67.5%입니다. 단순히 얘기하자면 매매가격의 절반 이상의 자금을 보증금의 형태로 무이자 대출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수억, 수십억원의 상품을 절반 이하의 자본만 갖고도 투자가 가능해지는 마법이 일어납니다. 가격 단위가 큰 만큼 조금만 올라도 자본 대비 큰 수익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불패' 신화는 장기적으로 깨진 적이 없습니다. 집주인의 마음이 어떻든 세입자는 '주거'의 개념에 머물러 있는 만큼 년 단위의 장기계약 중에서 꾸준히 아파트 가격은 우상향을 기록했습니다.
집 주인도, 세입자도, 이자를 받는 은행도 모두가 행복했던 제도가 다시 '기묘함'을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집값이 계속해서 빠르게 오르는" 대전제가 최근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인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연합뉴스
'깡통전세', '역전세' 등 전세의 부작용이 지난해 들어서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닙니다. 전세가 엄연한 투자 상품인 만큼 가격 하락기에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고질병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공공연하게 '전세의 종말'이 언급되는 것은 과거와 달리 부동산 시장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어서입니다. 전세제도가 없는 선진국에서는 '잃어버린 30년'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으로 이미 경험해본 일이기도 합니다.
이자보다 비싼 월세...전환 쉽지 않아
적은 자본을 가진 집주인이 보증금을 '레버리지'처럼 쓰는 전세 제도는 '부동산PF사태'와 비슷한 위험 요인을 갖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세가율 67%를 메우고 있는 보증금 역시 대부분 세입자의 빚이라는 점입니다. 사실상 집이라는 상품에 대한 대금이 거의 다 빚으로 메워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2000조원 돌파를 눈앞에 둔 가계부채가 보증금을 더하면 3000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너무 당연하게 '돌려받을 돈'이라고 인식한 나머지 우리가 부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돈입니다. 정작 돌려받지 못하는 위기가 오면 고스란히 우리 경제의 폭탄으로 돌아올 돈이기도 합니다.
선진국 대열에 이름을 올린 우리나라 역시 앞으로 장기적인 저성장 국면을 대비해야 합니다. 과거와 같은 '부동산 불패'가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옅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화에 기대온 전세제도 역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월세에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픽] 전세보증금 포함 가계부채 (서울=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그럼에도 전세의 품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도가 작동하는 동안에는 집주인과 임차인, 돈을 빌려줬던 은행마저도 모두 행복한 상태였거든요. 폭탄이 터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고, 행복한 꿈을 깨는 것은 지금 당장의 일입니다.
고수익 투자 상품을 버려야 하는 집주인도, 안정적인 대출 상품을 접어야 하는 은행도 이를 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목돈을 쟁여둬야 하는 세입자는 월세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꿈을 깨고 싶지 않은 주체 가운데 집을 '주거'로 바라보는 이들은 집이 없는 세입자들 뿐입니다. 집이 상품으로 남아있는 한 전세 제도가 사라지기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chlee1@fnnews.com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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