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좌측 그림은 명나라때 저술된 <본초강목>에 그려진 시(豕, 돼지)이고, 우측은 조선시대 한 여인이 돼지를 끌고가는 민화로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 태종 17년(1417년) 음력 1월, 태종은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다. 사신으로는 의정부 정2품에 해당하는 참찬 정구(鄭矩)가 축하 사절단의 대표로 선정되었고, 사절단에는 김을현(金乙玄)이 통역관으로 동행했다.
영락제의 생일이 음력 5월 2일인데, 조선에서 남경까지 가려면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음력 1월이면 출발해야 했다. 사신들은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남경은 송나라 때부터 명나라 수도였다.
그런데 남경에 있던 영락제가 음력 2월 13일 남경을 출발하여 북경(北京)을 향했다. 자칫 길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사신들은 남경으로 가던 도중 숙주(宿州) 근처에서 이동 중인 황제의 행차를 알현하게 되었다. 숙주(안휘성)는 북경과 남경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도시다. 영락제는 숙주의 임시 거처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사절단의 대표인 정구는 명나라 황제에게 “저는 조선의 의정부 참찬 정구(鄭矩)라고 하옵니다. 조선의 태종께서 황제의 성절(聖節)을 축하하기 위해 저희가 사절단으로 왔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하고 선물을 내밀었다. 김을현이 통역을 했다.
그러자 영락제가 “조선 사신의 이름이 정구(鄭矩)라면 여러 후궁 중 한 명과 친척인가?”라고 하고 물었다. 명나라 신하가 “사신 정구는 후궁 중 한 명인 정비(鄭妃)와 성이 같은 친척이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영락제는 당시 총 24명의 비(妃)를 두었는데, 그중 9명이 조선 출신이었다. 정비가 영락제 후궁이 된 지도 벌써 9년이 되었다. 황제는 사신들 중에 정비의 친척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황제는 내관을 불러서 “조선의 사신들에게 고기와 술을 대접하도록 하라. 그런데 내가 익히 조선의 후궁들에게 듣기로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돼지고기는 빼고 대신 소고기와 양고기를 내어 주도록 하거라.”라고 했다. 내관은 술과 함께 소고기, 양고기 등 진수성찬을 내어 왔다.
황제가 자리를 비우자 내관이 사신들에게 “조선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요? 무릇 돼지는 집에서 기르는 말, 소, 양, 돼지, 개, 닭에 해당하는 육축(六畜) 중 하나가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통역사 김을현이 “사실 조선에서는 돼지를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조선의 궁에서는 중국돼지인 당저(唐猪)를 제례용으로 사용하는데, 이마저도 사료가 부족해서 당저를 몇 마리만 암기고 외방 각도로 보내어 번식하도록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도 먹을 것이 부족해서 돼지를 기르기가 쉽게 않습니다. 돼지는 다른 가축과 달리 먹이를 너무 많이 먹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조선의 궁에서는 전구서와 예빈시에서 염소, 양, 돼지, 기러기, 오리, 닭 등의 가축을 키우는데, 쌀이나 콩 등의 사료가 많이 들어서 태종은 친히 <농상집요(農桑輯要)>에 따라서 관리하도록 했다. 특히 조선의 토종돼지는 크기가 작아서 살찐 돼지로 키우려면 사료가 너무 많이 들어서 중국에서 수입한 당저(唐猪)를 키웠다. 태종이 당저를 일반 백성에게 번식시켜 키우게 한 것은 제사에도 사용하고 노인을 봉양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하지만, 사실 궁에서도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명나라 내관은 “명나라 또한 요즘이 돼서야 돼지고기를 즐겨 먹기 시작했소. 과거 송나라 때 보면 우리나라도 돼지를 먹지 않았소이다. 송나라 때 소동파도 돼지고기를 노래한 시에서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貴者不肯吃),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네(貧者不解煮)’라고 했다오.”라고 했다.
그러자 김을현은 “게다가 조선에서는 돼지고기는 독이 있고 많이 먹으면 풍(風)이 생긴다는 소문이 있어서 안 먹는 사람들도 있소이다.”라고 했다. 내관이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 황제의 행차에 따라나섰던 의관(醫官)들이 이들을 말을 듣고 있다가 “조선에서 온 사신의 말이 맞소. 그러한 이야기는 원래 당나라 때부터 있었소이다. 당나라 때 저술된 <식료본초>에는 보면 돼지고기는 사람을 허(虛)하게 하고 풍(風)을 동하게 하기 때문에 오래 먹을 수 없다고 했소이다. 다른 의서들도 보면 돼지는 약간 독이 있다고 했고, 뇌를 제외하고서 혀, 밥통, 폐, 간, 쓸개, 창자, 콩팥, 다리 발굽, 기름 등 모든 부위를 약으로 사용하지만 고기만은 먹기에 알맞지 않다고 했소이다. 의서에 독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돼지고기는 상식(常食)이 아닌 약식(藥食)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다린 것을 저육탕(猪肉湯)이라고 해서 소갈증에 약으로 먹기도 했소.”라고 했다.
내관이 의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면 풍(風)이 온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의관은 “사실 돼지고기는 음물(陰物)이라 풍을 진정시킬 뿐 풍을 동(動)하게 하지 않소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과거 의서에 적힌 것을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생긴 기우(杞憂)일 뿐이오. 특히 양나라 때 의사인 도홍경이 ‘돼지는 최고로 많이 사용되는데, 오직 고기만은 먹을 수 없으니 사람이 많이 먹게 되면 모두 갑자기 살이 찌게 되는데 이것은 대개 기육(肌肉)을 허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바람에 후세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으면 물살이 찔까 봐 걱정하지만 돼지고기는 오히려 기운이 나게 하고 살집을 튼실하게 할 뿐이요.”라고 했다.
조선의 사신들과 내관은 의관의 말을 듣고서는 다행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들은 돼지고기를 맛보지 못해 아쉬웠다. 사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없어서 못 먹었을 뿐이거늘,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고 하는 바람에 잔치에 나오지도 않았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신들은 어쨌든지 돼지고기는 없었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고서 다음 날 황제의 대가 행렬을 따라서 북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어도 조선에는 돼지가 늘어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약 70여 년이 지난 1488년경, 명나라에서 온 사신 동월(董越)이란 자는 조선을 돌아보고 나서 <조선부(朝鮮賦)>를 기록했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조선인들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중략. 촌 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 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돼지는 조선 중기를 넘어서야 명실공히 조선인들의 가축(家畜)이 되었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식량이 늘었고 그래서 돼지 사료를 충당할 수 있는 집들은 돼지를 길렀다. 우리에 넣고 키우기도 하고 때에 따라 방목(放牧)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실학자인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1715년>, 서명응의 <고사신서(攷事新書), 1771년> 그리고 서호수가 편찬한 <해동농서(해동농서(海東農書), 1798년>에는 돼지사육 방법이 나와서 사람들은 돼지를 비교적 수월하게 기를 수 있었다. 이들 책에는 돼지 사료를 줄이는 법이며 돼지를 쉽게 살찌게 하는 방법도 나왔다.
조선 후기, 집집마다 토종돼지를 많이 길렀다. 돼지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잔치를 위해서라도 충분하게 기를만했다. 도처에 없는 곳이 없었다. 여인들조차도 돼지 귀에 줄을 묶어 끌고 다녔다. 토종돼지는 덩치가 작아 얻을 수 있는 고기양은 적었지만 육질이 선명하고 맛이 좋았다. 토종돼지는 작지만 탄탄한 체구에 검은 털로 뒤덮여 있고 이마에는 내 천자가 선명하고 꼬리는 위로 말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명실공히 토종흑돼지야 말로 진정한 한돈이었다.
돼지는 한 마리만 잡아도 온 가족이 오랫동안 몸보신을 할 수 있었고, 노령의 부모님께 고기를 올려 봉양할 수 있었다. 한꺼번에 먹지 못한 고기는 말려서 포(脯)로 만들어 오랫동안 먹었고, 나머지 허파나 염통, 발굽 등 모든 부속기관들은 제각기 쓰임에 따라서 약으로 사용했다. 돼지고기는 조선인들에게 언제부터인가 가장 흔하게 찾는 고기가 되었다.
* 제목의 ○○은 ‘돼지’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태종실록> ○ 태종 16년 병신(1416) 5월 7일. 命典廐署及禮賓寺所畜羔羊, 唐猪, 雁鴨, 雞所飼米豆甚多, 自今一依農桑輯要之法養飼. 且唐猪量宜留養, 餘送外方各道, 孶息料米豆, 亦依京中例養飼. (명하여 전구서와 예빈시에서 기르는 염소, 양, 당나라 돼지, 기러기, 오리, 닭 등을 사육하는 쌀과 콩이 너무 많으니, 이제부터 한결같이 농상집요의 법에 의하여 양사하고, 또한 당나라 돼지는 적당히 요량하여 남겨 두어 기르고, 나머지는 외방 각도로 보내어 번식하는 사료인 쌀과 콩은 또한 경중의 예에 의하여 양사하라고 하였다.)
○ 태종 17년 정유(1417) 1월 19일. 遣議政府參贊鄭矩如京師, 賀聖節也. 命買洪武年間建康所造角弓以來. (의정부 참찬 정구를 명나라의 경사로 보냈다. 이는 성절을 하례하기 위해서였다. 홍무 연간에 건강에서 만든 각궁을 사 오라고 명하였다.)
○ 태종 17년 정유(1417) 윤5월 8일. 節日使通事金乙玄回自北京啓曰: "皇帝於二月十三日發南京, 五月初一日下輦于北京. 皇太子在南京, 臣等向南京, 行至宿州, 謁皇帝大駕, 帝曰: ‘今來使臣, 無乃諸妃之親乎?’ 臣奏: ‘使鄭矩, 於鄭妃爲同姓之親.’ 帝召內官狗兒曰: ‘朝鮮人不食豬肉, 令光祿寺以牛羊肉供給.’ 遂命隨駕, 十日到北京" (절일사의 통사 김을현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 아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가 2월 13일에 남경을 출발하여 5월 1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황태자가 남경에 있으므로 신들이 남경으로 향해 가다가 숙주에 이르러 황제의 대가를 알현하였습니다. 황제가 ‘지금 오는 사신이 제비의 친척이 아닌가?’라고 하기에 신이 ‘사신 정구는 정비에게 동성의 친척이 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황제가 내관 구아를 불러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으며 마침내 수가하라고 명하여 10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25년 계해(1443) 3월 4일. 都承旨趙瑞康, 與扈駕宰樞議啓曰: "我國之人, 不嗜猪肉, 凡人尙然, 豈可用於闕內乎? 遠道姑停進上, 近道則不可停之."(도승지 조서강이 호가한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도 그러하온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먼 도는 진상하는 것을 우선 정지시키되, 가까운 도는 정지시킬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식료본초, 당나라> 猪. 肉: 味苦, 微寒. 壓丹石, 療熱閉血脈. 虛人動風, 不可久食. 令人少子精, 發宿疹. 主療人腎虛. 肉發痰, 若患瘧疾人切忌食, 必再發. (돼지, 육. 고기: 맛이 쓰고 성질이 약간 차다. 단석을 눌러 혈맥이 열폐된 것을 치료한다. 사람을 허하게 하고 풍을 동하여 오래 먹을 수 없다. 정을 적어지게 하고 숙진을 일으킨다. 신허를 주로 치료하고 고기는 담을 일으킨다. 학질을 앓는 사람은 절대 먹어서는 안되니, 반드시 재발한다.)
<증류본초, 11C말> 陶隱居云, 猪, 爲用最多, 惟肉不宜食, 人有多食, 皆能暴肥, 此蓋虛肌故也. (도홍경이 말하기는 돼지는 최고고 많이 사용되는데, 오직 고기만은 먹을 수 없으니 사람이 많이 먹게 되면 모두 갑자기 살이 찌게 되는데 이것은 대개 기육을 허하게 하기 때문이다.)
<조선부(朝鮮賦), 1488년> 所不可曉者, 家不豢豕, 蔬不設樊. 引重則惟見牛馬, 用馬馱者為多, 用牛者亦少. 芻牧絕不見羊羱. 鮮食則蹄荃山海, 蔬茹則采掇江灣. 自平安至黃海二道所見皆如此. 有至老村民而不一沾豕味者, 有偶沾燕賜而即夢踏菜園者. 官府乃有羊豕, 鄉飲時或用之.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에는 오직 소나 말 외에는 쓰는 것이 없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 목축에는 전혀 양을 볼 수 없다. 신선한 음식을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그물이나 통발을 쓰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오면서 본 것이 이러하였다. 촌 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 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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