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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조선' 하는 개미들, 그들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이창훈의 삶코노미]

'밸류업'에 인센티브까지 동원...저평가 해소 목적
1997년부터 '디스카운트' 지속..."투자가치 낮다" 평가
첫 단추로 '주주환원' 지목...기업 결단 내려야


'탈조선' 하는 개미들, 그들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이창훈의 삶코노미]
[서울=뉴시스] 돈키호테 조승우·산초 이훈진, '맨오브라만차'. 2021.02.07. (사진 = 오디컴퍼니 제공) photo@newsis.com /사진=뉴시스

[파이낸셜뉴스] "약자를 존중하고 지킨다" "부정과 악에 맞서라" "레이디의 명예를 존중하라"
모두 듣기만 해도 낭만이 넘치는 유럽 기사도의 준칙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기사는 영화·드라마 속 정의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비율이 높고, 이들이 외치는 신념 역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불편한 진실은 사실 '기사도'라는 수칙을 세우기 전까지는 정작 그 내용들을 지독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 기사들의 행태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약자를 무시하는 기사, 부정을 저지르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기사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사도'에는 제발 지켜줬으면 좋겠는 점들을 빼곡히 적게 됐다는 것입니다.

한국 주식시장이 부르짖고 있는 '밸류업'은 우리 기업들의 '기사도'와 같습니다. 한국의 개미투자자들은 왜 자꾸 미국을 향해 '탈조선' 하는 걸까요? 왜 정부까지 나서서 배당을 늘리고 주주환원을 확대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갖은 인센티브를 들고 오는 걸까요? 아직 '밸류업'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배고픈 IMF 시절' 머무른 韓 주식시장
한국 주식의 저평가를 일컫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입니다. 우리 기업들의 부실한 자본구조에서 세계 1위 규모의 분식회계까지 드러나며 당연히 가치 평가는 수직 하락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디스카운트'라기보다 일정 부분 제자리를 찾아가는 '햐향조정'의 의미가 컸습니다.

문제는 위기 당시 등장한 '디스카운트'가 20년이 흐르는 동안 회복기와 호황기에도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경쟁할 만한 기업들이 다수 생겨났지만 주식 가치는 경쟁자에 비해 놀랄만큼 작은 수준이죠.

'탈조선' 하는 개미들, 그들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이창훈의 삶코노미]
[그래픽] 주요국 주가순자산비율(PBR) 현황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사진=연합 지면화상
주식의 가치를 가늠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이 주가순자산비율(PBR)입니다. 주당순자산은 기업이 당장 문을 닫을 경우 주식 1주당 떨어지는 돈을 의미합니다. 주가는 시장에서 주식이 팔리는 가격이죠. PBR이 1이라는 의미는 주식을 산 회사가 갑자기 망해도 최소한 본전은 찾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당장 문을 닫을 회사의 주식을 사는 사람은 없죠. PBR은 투자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시장일 수록 높게 나타납니다. 이 회사가 당장 망하지 않고 앞으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주가가 순자산보다 높게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PBR은 지난해 결산 기준 간신히 1을 맞췄습니다. 사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평균치를 봐도 1.2 수준으로, 계속해서 '본전' 안팎을 왔다갔다만 하는 중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주식을 산 기업은 세계 선진국의 최고 기업들과 경쟁 중인데 주식 가치는 겨우 본전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밸류업' 주체는 '소수'...자율참여 이뤄질까
우리나라 기업들의 PBR이 유독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통상 PBR을 올리려면 기업 이익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업이 수익을 많이 낼 수록 PBR은 올라가는 것이 공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세계 어느 기업에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익을 내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PBR이 낮은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수익이 고정돼있다면 PBR에서 남은 변수는 '기업의 순 자산'입니다. PBR 계산식에서 분모와 관련된 부분이죠. 기업이 혹시 몰라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많을 수록, PBR은 낮아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부가 기업에게 '주주환원'을 독려하는 것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수익이 아무리 많이 나더라도 주주들과 쉽게 공유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외국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상하게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주주는 기업의 수익과 무관한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굳이 돈을 내고도 주인행세를 할 수 없는 기업에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추가적인 투자 채널의 문은 닫히고 PBR은 더 낮아지는 악순환 구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탈조선' 하는 개미들, 그들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이창훈의 삶코노미]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사진=뉴스1
정부는 이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첫 단추로 '주주환원'을 들고 왔습니다. 수익이 충분하다면 이제 주주에게도 이익을 공유하라는 말이죠. 단기적으로 보면 기업의 자산을 줄이는 행위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며 충분한 환원이 이뤄진다는 계산입니다. '실질적인 주인'인 주주들도 환영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식을 산 기업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블룸버그 통신은 “한국 기업은 취약한 기업 지배 구조와 소액주주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로 인해 낮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죠. 우리 증시는 소액주주 수만명의 합보다 소수의 지배주주를 위해 아예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사례가 빈번한 시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부까지 나서서 주주환원을 늘리는 증가분만큼 세제 혜택을 주겠다는 인센티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미'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가까운 인센티브지만, 누군가에게는 크게 매력적인 선택지임에 틀림 없습니다. chlee1@fnnews.com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