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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고속버스 처음 달리다

[기업과 옛 신문광고] 고속버스 처음 달리다
대망의 1970년대가 열리면서 첫 번째로 국민들에게 날아든 빅뉴스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이었다. 공식적인 개통일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공사가 완료된 1970년 7월 7일이다. 전 구간을 뚫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년5개월이었다. 고속버스 회사들은 그 전에 완공된 구간부터 운행을 개시했다. 서울과 대전 구간은 대전까지 고속도로가 완공된 바로 그날인 1969년 12월 10일부터 한진고속이 운행을 시작했다(동아일보 1970년 12월 31일자·사진).

당시에는 종합터미널이 없어 버스회사마다 각자 터미널을 갖고 있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서울 동자동에, 한일·한남·천일은 을지로 6가에, 유신은 옛 스카라극장 옆에 있었다. 서울 반포에 고속버스종합터미널이 완공된 것은 1977년이다. 서울 시민 대부분이 강북에 거주할 때라 반포 터미널에서 내려 강북으로 이동하는 데 불편을 겪었다.

고속도로는 '꿈의 길', 고속버스는 '달리는 궁전'이라고 불렸다. 초창기 고속버스에서는 음악을 틀어주고 명승지를 지날 때면 안내양이 안내방송을 했으며 승객들에게 보리차 대접도 했다. 싸고 시설 좋은 고속버스에 승객이 몰리는 바람에 기차는 승객이 줄어 애를 태웠다. 고속버스는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들여왔다. '미쓰비시' '그레이하운드' '벤츠' 등의 이름을 단 외국산 고속버스들이 고속도로를 누볐다.

서울~부산 간 고속버스는 완공 이튿날인 7월 8일 처음 달렸다. 서울에서 출발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에는 승객 38명이 탔는데 운전사가 두 명이었다. 승객에게는 간식이 제공됐다. 첫 승객들은 추풍령 위령탑 앞에서 건설공사 중에 희생된 근로자들에게 묵념을 올렸다고 한다.

고속버스는 하루 운행하던 200여대 중 10여대가 고장으로 멈춰 서 승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고속도로상에서 고장 난 고속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운전 미숙으로 운행 한달여 만에 대형사고가 나 신문 1면 기사로 대서특필됐다. 추풍령 휴게소로 들어가던 고속버스가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25명이나 사망한 것이다. 안전을 무시한 채 운행부터 강행한 결과였다. 고속버스를 처음 타는 승객들은 안전벨트가 무슨 용도인지도 알지 못해 매지 않았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땅 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릴 만큼 인기가 있었다. 월급은 3만원으로 당시로서는 높은 편이었다. 적어도 고졸 이상의 학력과 키 160㎝ 이상의 조건을 갖춰야 했다. 시험에 붙으면 손님을 상냥하게 응대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일반 버스의 경우 차장이라고 불렀는데, 고속버스 안내양이 생기면서 점차 안내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멀미약을 달라" "물을 달라"는 승객들의 주문도 많아 결코 편안한 직업은 아니었다. 안내양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없어졌다.

논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건설되다 보니 농기구를 든 농부나 도로 주변 주민들이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실제로 고속도로를 건너는 사람 때문에 고속버스가 전복돼 승객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갓길로 다니는 사람도 자주 목격됐다. 버스 선반에 올려 둔 카메라나 현금을 도난당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있었다.

처음엔 휴게소가 없어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운행 도중에 소변이 급한 승객들은 차를 세워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운행을 멈추고 고속도로에 버스를 세우면 주변의 논두렁이 야외 변소로 변했다. 여성 승객들이 문제였다.
벌판만 있는 곳에서는 몸을 숨길 곳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어떤 버스는 뒤쪽에 양변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사용법을 모르는 승객이 신발을 신고 변기 위에 올라앉아 용변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고와 불편 호소가 잇따르자 당국은 추풍령 휴게소 외에 대전, 옥천, 대구 주변에 휴게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급한 대로 비상전화와 차량 점검대를 가설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