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부국장
무더위와 장맛비가 반복되는 여름의 한복판이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날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을 정도로 여름의 위세가 대단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여름 더위를 피하는 법에 관한 시를 몇 수 남겼다.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여덟 수다. 다산은 여기서 월야탁족(月夜濯足·달밤에 물에 발 담그기), 우일석운(雨日射韻·비오는 날에 시짓기), 동림청선(東林聽蟬·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 같은 것들을 제안했다. 다산이 여름날의 무더위를 피해 찾아낸 작은 행복들이다.
그런가 하면 '만다라'를 쓴 승려 출신 작가 김성동(1947~2022)은 '가만히 있기'를 주변에 적극 권유했다. "여름에는 동즉손(動卽損·움직이는 것이 손해)이니,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면서다. 풍광 좋은 산이나 계곡으로 원족을 가는 것도 좋지만, 조용히 집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김성동은 여름이면 하루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심리학자 서은국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쾌(快·행복)는 동(動)에서 비롯된다. 행복해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날씨엔 잠깐 쉬어도 괜찮다.
무더위 속에서 2024 파리 올림픽이 개막했다. 더위를 잊고 즐겁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며) 올림픽 보기'를 추천한다. 이번 올림픽은 지난 1924년에 이어 프랑스 파리에서 100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회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7일 새벽 열린 개막식은 파격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이른바 '톨레랑스'를 유감없이 보여줬다는 평가다.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장이 아닌 야외에서 개막식을 개최하는 과감한 발상과 용기도 눈길을 끌었다. 센 강변의 노트르담대성당을 비롯해 루브르박물관, 콩코르드광장, 그랑팔레 등 유서 깊은 공간에서 펼쳐진 공연들도 볼거리가 넘쳤다.
하지만 파리에서 날아올 기분 좋은 소식은 이런 것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더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건 V, I, C, T, O, R, Y, 즉 승리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이 '올림픽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경기는 이겨야 제맛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건 '승리보다 노력'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어낸 승리'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도 의미 있지만 이왕이면 잘 싸워서 이기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 그것이 더 값지고 기분 좋다. 여자 핸드볼 예선 1차전에서 최약체 대한민국이 강호 독일을 23대 22로 따돌리고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의 그 짜릿함을 떠올려보라.
이제 우리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금메달은 펜싱과 양궁에서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밖에도 수영, 사격, 배드민턴, 태권도 등에서 깜짝 메달을 기대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한체육회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금메달 목표치를 5개로 내려 잡았다. 그러면서 "종합순위 15위를 예상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20위권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선수단이 지난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역대 최소 규모로 꾸려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는 너무 소극적인 자세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해외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전망치를 내놓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국 데이터 분석업체인 그레이스노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금메달 9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3개로 종합순위 10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그중에서도 양궁은 남녀 단체전과 혼성 단체전을 모두 휩쓸어 금메달 3개를 수확하는 등 메달밭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밖에 펜싱 남자 사브르와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 금맥이 터지고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도 중국세를 꺾고 금메달을 딸 걸로 봤다. 또 태권도의 서건우와 스포츠클라이밍의 이도현, 역도의 박혜정도 깜짝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이들 말고도 승전보를 알릴 선수가 더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스포츠의 의외성이다. 2024년 여름을 책임질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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