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기업과 옛 신문광고] ‘양탕국’을 대중화하다

[기업과 옛 신문광고] ‘양탕국’을 대중화하다
대한민국은 가히 카페 공화국이다. 다방, 커피숍에서 변화해 온 커피 전문점 카페는 커피를 비롯한 식음료를 파는 휴식공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서울 종로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라고 한다. 거의 100년이 흐른 지금 전국 카페 수는 10만개를 넘어섰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선두주자인 스타벅스 매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893개에 이른다.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하는데 일본과는 불과 8개 차다.

카페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늘기 때문이다. 집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문화가 사라지고 1인가구가 늘면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얘기할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대화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의 공부공간, 직장인들의 작업공간으로 카페의 쓰임새는 넓어지고 있다.

분위기가 조금 다른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던 1960년대만 해도 수입에 의존하는 커피는 위스키처럼 사치품 취급을 받을 정도로 귀했다. 외제품 단속의 표적으로 삼으며 당국은 커피를 강제로 팔지 못하도록 했다. 어기면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다방 업주들은 이에 반발해 소송을 냈다가 졌다. 법원은 "커피를 판다는 것은 좋은 풍속은 아니며 따라서 풍속을 문란케 할 염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국무총리가 공무원들에게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당시 시중 커피의 90%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마저 물량이 적어 이미 커피 맛을 알아버린 소비자들은 안달을 냈다. 이러다 보니 가짜 커피가 나돌았다. 커피 찌꺼기를 사용한 가짜는 그나마 양반이고 썩은 콩가루에 엿과 설탕을 섞거나 심지어 톱밥에 물을 들여 제조한 가짜 커피도 있었다.

국산 커피를 최초로 생산한 기업은 동서식품이다. 1968년에 서정귀와 신원희, 윤봉기 등이 설립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합작하려 했다가 여의치 않아 '맥스웰' 브랜드로 유명한 미국 제너럴푸드로부터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1970년부터 커피를 생산했다(조선일보 1970년 12월 22일자·사진). 구한말 국내로 들어와 고종이 '양탕국'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커피를 순 우리 기술은 아니지만, 드디어 가정에서도 쉽게 즐기게 된 것이다.

광복 후 한국인들이 처음 맛본 커피는 미국산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직접 가져온 고급 커피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입맛은 기술제휴로 만든 커피를 단박에 알아차렸다고 한다. 당시 우리 국민은 한 해에 고작 커피 26잔을 마셨지만, 입맛만은 고급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나온 합작 제품을 선호하지 않아 오리지널 미국 제품과 경쟁을 벌여야 했다는 말도 있었다.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동서식품은 1975년 최초로 호주에 인스턴트 커피 50t을 수출하는 등 빠르게 국내 커피 시장을 장악하고 키워갔다. 이듬해 커피믹스를 개발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였다. 맥스웰 커피를 담은 유리병은 그 자체로 품질이 좋아 도시락 반찬, 특히 국물이 흐르기 쉬운 김치를 담는 용도로 인기였다.

그런데 사실은 1968년에 나온 국산 커피의 효시는 동서식품이 아닌 미주산업의 'MJC 커피'라고 한다. 판매량에서 동서식품에 이은 제2의 커피기업으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서울 압구정동을 필두로 'MJC카페'를 열며 사업을 이어갔지만,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 1980년대 말에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국내 최초의 캔커피는 1977년의 씨스코에서 내놓은 '타임커피'다. 우유를 반을 섞은 '카페오레'라는 밀크 캔커피도 함께 출시했는데 시기가 일러 사라지고 말았다.
캔커피 시장은 동서식품이 1986년에 첫 제품을 내놓으며 활성화됐다. 동서식품은 시장점유율 90%를 차지하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1991년 롯데칠성음료가 '레쓰비'를 내놓으면서 시장 판도가 뒤집혔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