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과 세자(훗날 순종)의 사진이다. 오른쪽은 고종이 커피를 마실 때 사용한 은제 커피잔이다.
조선 말기 김홍륙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한양 정동에 살아서 사람들은 정동대감이라고 불렀다. 김홍륙은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고종 옆에서 통역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승승장구했다. 러시아공사에도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김홍륙을 더더욱 필요로 했다.
급기야 김홍륙은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넘겼고 고종에게도 함부로 대했다. 그래서 고종은 아관파천 후 1년 정도 지난 뒤에 환궁을 하고 나서 김홍륙을 처단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김홍륙은 신하들의 상소로 인해서 파면을 당하고 곤장 100대를 맞고서 흑산도로 유배된다.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고종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김홍륙은 유배를 떠나기 전에 손주머니 안에서 아편 1냥을 꺼내서 심복인 공흥식에게 전하면서 나지막하게 “이 아편을 어선(御膳)에 몰래 섞어서 올리도록 하게나.”라고 했다.
공흥식은 “염려마십시오. 차질없이 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흥식은 이 거사를 김종화에게 맡겼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창고지기로서 임금에게 바치는 서양요리 전담 요리사였다. 일전에 요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쫓겨난 상태였기에 역모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공홍식은 김종화에게 은화 1000원을 주고 포섭했다. 김종화는 고종의 생일날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고종은 커피를 즐겼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커피를 처음 마셔본 이후 계속해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
1898년(고종 35년) 9월 12일, 김종화는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었다. 아편은 특이한 맛이 있으면서 강한 쓴맛이 난다. 그리고 물이나 술에 잘 녹는다. 그러니 커피에 아편을 넣어서 녹이면 커피의 쓴맛 때문에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평소에 마시는 커피맛이 아니었기에 “오늘은 커피맛이 다르구나.”라고 하면서 몇 번 맛을 보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반면에 커피 맛을 잘 몰랐던 세자는 모두 마셨고, 결국 구토를 하고서 쓰러졌다. 바로 그 유명한 독다사건(毒茶事件)이었다. 당시 고종은 43세, 세자는 25세였다.
궁내부 대신 이재순이 고종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와 태자가 동시에 수라를 통해 건강을 해쳤다고 하는데, 수라를 진공할 때 애당초 신중히 살피지 못했음에 너무나 놀랍고 송구하옵니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법부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나라의 형률을 바로 잡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엄한 목소리로 “이 사건을 경무청으로 하여금 근본 원인을 엄히 밝혀내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결국 경무청의 조사를 통해 사주한 인물이 김홍륙이란 것이 밝혀졌다. 경무청은 관련된 범인들을 모두 잡아냈고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마약 커피를 마시지 않은 고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세자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세자는 며칠동안 드러누워 혈변을 봤고 치아가 모두 빠졌다. 세자는 결국 젊은 나이에 틀니를 끼게 되었다. 훗날 순종왕이 되어서도 자녀가 없는 이유가 아편독으로 인해서 생식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다면 아편으로 독살이 가능한 것일까? 아편은 다른 마약류에 비해서 약성이 강해서 적은 양이라도 한꺼번에 복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공흥식이 김홍륙에게 건네 받은 아편이 1냥이니 37.5그램이었다. 아편은 한번에 2그램 정도면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양으로 그 이상의 양이면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김종화가 커피에 얼마만큼의 아편을 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사량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보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서 나라의 주권이 박탈되자 <매천야록>을 지은 구한말의 재야 문인인 황현은 소주에 아편을 섞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가 있다. 황현은 당시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는데, 그가 지은 <매천집>에는 다음과 같은 싯구가 있다. ‘아편을 탄 술은 달기가 꿀과 같네[아연지주(鴉烟之酒) 감지약밀(甘之若蜜)]’라는 내용이다.
아편은 양귀비(앵속각)의 덜 익은 씨앗의 꼬투리에서 유액을 말려 농축한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양귀비가 많았다. 양귀비는 앵속각이라고 해서 약으로도 사용했는데, 기침, 천식에 효과적이었고 특히 지사제로도 썼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귀비는 마약보다는 가정상비약의 인식이 강해서 양귀비를 기르는 것을 특별한 단속하지 않았다.
현재는 양귀비는 마약류로 분류되어 재배 및 약용이 금지되어 있다. 다만 아편과 같은 일부 마약류는 철저한 관리하에 의약품으로 허가되어 있다.
조선 후기만 해도 아편은 조선에서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청나라에는 일찍이 서양에서부터 아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840년 헌종 6년에 중국을 다녀온 사신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사람이 아편(鴉片)을 몰래 가져와 몸과 목숨을 상해하는데, 그 해독(害毒)을 입은 어리석은 백성이 유혹을 받고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러도 뉘우쳐 고칠 줄 모르므로 황제가 진노하여 여러 번 유지를 내려 엄히 금지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에서부터 들어온 아편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1840년에는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청나라 사람들이 빼앗아 불태워 아편전쟁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아편을 금하고 있었다. 1848년(헌종 14년)에는 조선의 통역관 중 한 명이 아편 연기를 빠는 기구를 중국에서 가져오다가 의주에서 잡히자 사형을 시키고자 했으나 특별한 법령이 없어서 사형은 면하고 추자도로 종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은 누구나 아편을 피웠다. 1872년(고종 9년) 청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온 민치상이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기도 했다.
“전에는 아편연(鴉片烟)을 피우는 자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아편을 피우는 도구들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오히려 아편을 피우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었으며 아편을 피우는 도구를 아무렇게나 마구 팔고 있어도 금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관에서 세금을 걷고 있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아편연은 아편을 곰방대에 넣어서 담배처럼 피우는 것을 말한다. 구한말 이후 조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아편이 보편화되었다. 아편은 일본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주요 수단이 되어 한반도내에서 직접 양귀비를 다량 재배해서 아편을 만들었다.
당시 아편은 모르핀 진통제로서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조금만 아파도 모르핀을 맞았다. 심지어 아편은 밭일을 나가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손쉽게 재울 수 있는 특효약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도 아편 중독자들이 상당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아편은 일국의 왕을 독살시키는 독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편은 마약의 심각한 폐해 때문에 철저한 단속을 한다고 하지만, 최근에 다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땅에는 다시 새로운 아편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 제목의 ○○은 ‘아편’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고종실록> 고종 35년 1898년 9월 12일. 陰曆本年七月十日, 金鴻陸承流配詔勅, 同日發配之路, 暫住金光植家, 搜出一兩鴉片於所携手帒, 猝發凶逆之心, 給付所親人孔洪植, 密嗾調進於御膳矣. 陰曆七月二十六日, 洪植逢金鍾和, 備說受嗾於鴻陸之狀, 以此藥物調進於御供茶, 則當以一千元銀酬勞云. 鍾和曾以寶賢堂庫直, 御供洋料理擧行, 因不善擧行而見汰者也. 卽袖該藥入廚房, 投下珈琲茶罐, 竟至進御.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을 받고 그날로 배소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에게 주면서 어선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어공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의 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의 창고지기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헌종실록> 헌종 6년 1840년 3월 25일. 首譯別單. 전략. 西洋人入中國者, 播傳邪敎, 陷溺人心, 挾帶鴉片, 戕害身命, 而愚氓之受其毒者, 始則被人引諉, 繼則習染邪說, 甚至蕩産戕生, 罔知悛改, 皇帝震怒, 屢下諭旨, 嚴加禁斷. 上自朝官, 下至軍民, 以此獲罪, 不下屢萬. (수역의 별단에 이르기를, 전략. 중국에 들어온 서양 사람이 사교를 퍼뜨려 인심이 빠져들고, 아편을 몰래 가져와 몸과 목숨을 상해하는데, 그 해독을 입은 어리석은 백성이 처음에는 남의 유혹을 받고 이어서 사설에 물들어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러도 뉘우쳐 고칠 줄 모르므로, 황제가 진노하여 여러 번 유지를 내려 엄히 금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로 조관으로부터 아래로 군민에 이르기까지 이 때문에 죄받은 자가 수만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 헌종 14년 1848년 5월 9일. 命秋曹囚朴禧英, 減死爲奴于楸子島. 禧英, 象譯流也, 鴉片烟取吸器具, 被捉於灣府, 而用律無可據, 有是命. (추조의 수인 박희영을 사형을 감면하여 추자도에 보내어 종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박희영은 역관배인데 아편 연기를 빠는 기구를 가져오다가 만부에서 잡혔으나 의거할 율문이 없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
<승정원일기> 고종 9년 1872년 4월 4일. 致庠曰, 전략. 且鴉片烟之無人不吸, 大可憂憫, 前日則吸之者, 恐或人知, 祕其烟具, 今行見之, 反以不吸爲恥, 烟具亂賣, 非徒不禁, 至有自官征稅, 其習俗之漸變, 於此可見矣. (민치상이 아뢰기를 “전략. 또 아편연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크게 걱정할 만하였습니다. 전에는 그것을 피우는 자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아편을 피우는 도구들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행으로 가서 보니 오히려 아편을 피우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었으며, 아편을 피우는 도구를 아무렇게나 마구 팔고 있어도 금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관에서 세금을 걷고 있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습속이 점차 변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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