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금성사가 'A-501' 라디오를 개발하면서 시작된 국산 전자제품 역사의 발걸음은 텔레비전을 거쳐 오디오로 옮겨갔다. '매킨토시' '마란츠' '럭스맨' '산스이' '켄우드' 등 밀려드는 미국과 일본 오디오 제품들에 맞서는 국산 제품들이 나타난 것이다. 전자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복잡한 오디오 기기를 제조한 것은 한국인의 타고난 손재주 덕이었다. 그 첫 주자가 천일사의 '별표전축'으로 우리나라 오디오의 원조다. 오디오 세트를 당시에는 전축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전축은 다리가 4개 달린 일체형으로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된 제품은 중고로 거래되고 있다.
창업주 정봉운씨는 젊은 시절 짜장면 배달 등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 서울 청계천 4가에 있던 천일백화점에서 이불 가게를 운영했다고 한다. 장사가 잘돼 돈이 모이자 정씨는 관심이 많던 전자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전축을 조립해서 판매하는 천일사를 종로에서 창업한 때가 1957년이었다. 금성 라디오도 나오기 전이었다. 처음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라디오를 해체해 그 부품으로 전축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일이라는 이름은 이불 가게가 있었던 백화점에서 따온 것이다. 오디오의 불모지를 맨손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더 있었다. 성우전자의 유명한 '쉐이코'와 '바이킹'이라는 상표의 전축도 별표전축의 경쟁 상대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나온 별표전축은 만듦새가 비교적 훌륭했다. 외국산과 비교해도 품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가격도 비쌌다. 1977년 광고를 보면 앰프와 전자식 튜너, 스피커, 턴테이블을 갖춘 최고급 모델 '6900' 가격은 30만1500원이었다(경향신문 1977년 7월 29일자·사진). 일반형인 모델 '1200'은 14만9400원이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38세 과장급 공무원의 월급 실수령액이 11만원 정도였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별표전축 한대 값이 1000만원을 훌쩍 넘은 셈이다. 별표전축은 어지간히 사는 집에서도 소유하기가 쉽지 않았고 부잣집 안방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부(富)의 상징이었다. 곗돈 타면 장만하고 싶은 물건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가정보다는 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이나 술집의 필수품이었다. 천일사 본사와 공장은 서울 광진구 중곡동 용마산 아래에 있었고, 나중에 경북 구미공단에도 공장을 지었다.
후발 주자인 동원전자의 '인켈'과 경쟁하며 별표전축은 품질을 인정받아 오디오 강국인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세계 20여개국으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1977년 무렵 천일사는 국내 오디오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며 종업원이 1500여명이나 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해 2000만달러 수출도 달성했다. 독일과 기술제휴를 하고 포르투갈과 남미에 현지 공장을 지을 계획도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천일사에 위기가 찾아왔다. 대기업들의 시장 진출로 경쟁이 심해지던 상황에서 창업주 정 회장이 탈세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 바람에 경영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1978년 12월 천일사는 태광산업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운명을 맞았다. 태광이 인수한 천일사는 1979년 '에로이카' 브랜드를 선보이며 명성을 지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로이카 앞에는 별표전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천일사라는 사명은 한동안 유지되다 1982년 태광전자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별표전축이라는 이름도 천일사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오디오는 혼수품의 맨 윗자리에 오를 정도로 수요가 점점 늘었다. 에로이카의 태광은 일본 도시바와 기술제휴로 서라운드 컴포넌트인 '토파즈 G7'이란 히트작을 내놓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쾨헬'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태광은 컬러텔레비전도 생산했다. 삼성전자와 롯데전자에 이어 아남전자까지 많은 대기업이 오디오 시장에 뛰어들어 에로이카와 인켈을 위협했다. 국산 오디오는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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