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거인 퇴장과 함께 추락
혁신보다 이익, 미래 못봐
겔싱어 승부수도 역부족
최진숙 논설위원
트랜지스터를 발명해 세계 과학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으나 괴팍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던 미국의 윌리엄 쇼클리. 1959년 9월 그의 연구소에서 탈출을 모의한 7명의 과학자는 마지막 결정적인 한 명의 동참 여부에 가슴을 졸인다. 로스알토스의 자택을 찾아간 그들은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리콘밸리의 영웅 로버트 노이스가 '8인의 배신자' 마지막 멤버였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바닷가에 회사를 세운다. 노이스는 실리콘 소재가 전자회로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이고 이 재료가 트랜지스터 기반이 될 것이며 이 기본물질을 가장 잘 활용할 능력자가 자신이라고 투자자를 설득했다. 동부의 전설적인 벤처투자자 셔먼 페어차일드가 자금을 댔고, 그래서 회사 이름이 페어차일드가 됐다.
이 회사를 세상이 기억하는 것은 훗날 정보통신 혁명의 기반이 되는 집적회로가 여기서 발명됐기 때문이다. 당시 앞선 연구자들의 경쟁은 트랜지스터 소형화에 있었다. 노이스는 획기적인 평판형 공정으로 이를 실현한다. 페어차일드의 집적회로는 그 많던 트랜지스터 경쟁사들을 단숨에 밀어냈다.
패기만만한 직원들은 페어차일드를 떠나 스스로 창업자가 된다. 동부의 투자자가 책정한 보상시스템에 불만도 없지 않았다. 노이스도 결단의 시간 앞에 선다. 이를 의논했던 유일한 상대가 고든 무어다. 8인의 배신자 중 한 명이었으며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 무어다. 그렇게 페어차일드를 나와 1969년 둘이 만든 회사가 인텔인 것이다.
겸손과 예의가 몸에 밴 무어는 역사에 남을 과학적 성취에도 생활은 평범했다. 회사에선 칩 성능을 높이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주말엔 아내와 낚시여행을 갔다. 그는 10년간 마이크로칩에 집적될 트랜지스터 수가 12~18개월에 두배씩 증가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이 무어의 법칙이다. 무어가 과학적 근거를 갖고 예언한 건 아니었다. 성능이 개선되면 가격은 계속 내려간다는 게 핵심 메시지였는데, 그대로 적중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칩 시장은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소형 컴퓨터 등 전자기기 신문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두 사람은 이 격동의 시간이 버거웠을 것이다. 헝가리 이민자 출신에 강인한 성격의 앤디 그로브가 두 창업자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화학을 전공한 그로브는 페어차일드 시절부터 함께한 인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자유주의자 노이스, 뼛속까지 과학자인 무어, 여기에 목표를 향해 무자비하게 돌진하는 그로브. 세 명의 조합이 그렇게 완성됐다.
관리자 그로브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전까지 메모리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던 인텔을 중앙처리장치(CPU) 시장 최강자로 끌어올린 이도 그로브다. 당시 세계를 호령했던 IBM의 PC에 CPU를 독점 공급하면서 인텔의 기술은 산업계 표준이 된다. 무어의 법칙 수호자를 자처했으며 주기적으로 맞은 불황의 시간엔 누구보다 단호했다. 외계인을 잡아다 칩을 만든 게 아니냐는 탄성도 이 시기 나왔다.
2000년대 들어 세 거인의 퇴장과 함께 인텔의 시대는 저문다. 새로운 수장 폴 오틸리니는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칩 공급 제안을 뿌리쳤다. 다가올 스마트폰 시대를 보지 못한 치명적 실책이었다. 뒤를 이은 재무통 브라이언 크리즈나크는 혁신보다 단기 성과에 급급하다 연구개발(R&D) 인력을 과감히 해고한다. 보석 같은 인재가 경쟁사로 뻗어나갔다. '영원한 CPU 2등' AMD가 지금 판세를 뒤집고 있는 것도 그 영향이 작지 않다.
그로브 시대 개발자 출신 펫 겔싱어가 인텔 CEO로 복귀해 부활의 시동을 걸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최근 인텔은 2·4분기 어닝쇼크를 발표하면서 대규모 인력조정과 사업철수 계획을 밝혔다. 창사 이후 최대 위기다. 칩스법까지 만들어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한 미국 당국도 당혹스러울 것이다. 무한경쟁, 기술전쟁 시대에 영원한 승자가 어디 있겠나.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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