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 주필
G 라이디, J 켈리, D 코스타…. 2001년 9·11 테러 당시 사망한 희생자 이름 중 일부이다. '그라운드 제로.' 테러로 무너진 뉴욕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만들어진 추모시설의 명칭이다. 추모시설 겉면을 둘러싼 강철 구조물에는 9·11 테러 희생자,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 사망자 등 30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 구, 김, 조 등 한국계도 여럿 보인다. 이름에 꽂혀 있는 장미는 고인의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추모의 표시로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뉴욕 체류기간이 마침 9·11 테러 23주년 추모식 시기와 겹친 덕에 그라운드 제로를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사라진 무역센터 쌍둥이빌딩 위치에는 검은색 돌로 만든 두개의 거대한 풀(pool)이 남쪽과 북쪽에 만들어졌다. 물이 차 있는 풀과는 달리 텅 빈 공간을 둘러싼 사방의 벽을 타고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리고 있고, 그 물은 다시 바닥에 뚫린 작은 사각형의 구멍을 통해 깊이를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 앞에 없는 건물과 사람을 상징하는 빈 공간을 바라보며 희생자와 가족들 그리고 그 자리에 우연히 모인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함께 흘리는 눈물이 합쳐져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되는 것이리라.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어떻게 매년 수백만명의 세계인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만들었을까. 외부의 공격을 분열 대신 통합, 갈등 대신 치유의 계기로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그라운드 제로와 추모관을 둘러보며 절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내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국가적 비극에 정치를 끌어들이는 행태를 철저히 배격하는 자제의 자세를 우선 들고 싶다. 정치인과 국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올해 추모행사가 바로 그랬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뉴욕 추모식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해리스, 트럼프 후보는 불과 10여시간 전 치열한 토론을 벌인 바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서 인신공격까지 주고받으며 얼굴을 붉혔던 정치공방을 읽을 수는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누구도 연설에 나서지 않았다. 유족과 동료 등이 2명씩 연단에 올라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일부는 그들과의 추억을 말하는 게 행사의 전부였다. 3000여명을 일일이 호명하는 긴 시간 동안 정치인들이 나설 자리는 없었다. 행사의 주인공은 대통령도, 대선 후보도 아닌 희생자들이었다. 비극을 통합의 계기로 승화시키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직 경찰관, 소방관 등을 여전히 예우하는 방식으로 '영웅 만들기'를 일상화하는 문화도 한몫했을 것으로 본다.
세월호, 이태원 등 국가적 비극의 현장이 느닷없는 정치공방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우리를 생각하면 미국의 9·11 추모식은 부러운 모습이다. 비극의 현장은 고사하고 경축의 장이어야 할 광복절마저 정치적 이유로 갈라져 싸우는 정치 과잉이 문제인지, 작은 차이를 크게 만들고 좋은 점 대신 흠집만 부각시키는 영웅부재의 사회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단서는 앞서 본 희생자들의 이름을 배열한 방식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개는 알파벳순으로 배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새겨진 이름을 아무리 보아도 그런 방식의 순서가 보이지 않아 무작위 배열이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생전에 서로 알던 사람들을 가까이 배치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추모공원을 디자인한 이스라엘계 미국인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인이 된 사람들도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을 바라보고 추모하는 산 사람들이야말로 더 절실하게 서로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두가 그런 절실함을 깨달을 때서야 고인들의 희생이 통합의 상징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dinoh7869@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