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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전에는 술이었으나, 나중에는 OO였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한동하의 본초여담] 전에는 술이었으나, 나중에는 OO였다
조선 후기 화가인 신윤복(1758~1814년경)의 풍속화 '유곽쟁웅(遊廓爭雄)'으로 술집 앞에서 선비들이 술에 취해서 몸싸움을 벌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신윤복이 태어날 당시 영조의 10년 금주령이 있었다.


영조 33년(1757년), 영조는 전국적으로 엄한 금주령을 내렸다. 영조가 금주령을 내린 이유는 가뭄으로 인해서 흉년이 들어서 쌀과 밀 등이 부족해진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술주정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에는 술로 인해서 싸움이나 살인 등이 많았다.

그런데 술은 마시면 없어지는 것이어서 증거가 부족했다. 마시는 장면을 잡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백성들은 몰래 술을 빚어서 온돌방에 항아리를 숨겨 놓고 땔감으로 숨겨두기도 했다. 게다가 술독을 찾아내더라도 “이것은 식초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 할 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애매한 사건이 벌어졌다. 영조 33년(1757년) 11월 19일 늦가을 어느 날, 유세교라는 자가 몰래 술을 빚었다가 발각되었다. 유세교는 가전별초로 어영청 소속의 군인이었다.

영조는 “죄인을 잡아들여라.”라고 했다. 영조는 유세교를 보고 “너는 금주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술을 빚어서 금령을 어긴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세교는 “이것은 식초이지 술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영조는 유세교의 말을 믿지 않고 곤장 2대에 처하도록 했다.

영조는 곤장을 때리도록 명한 후에도 유세교가 식초라고 우기자, 모든 신하들에게 술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유세교가 빚은 술독을 운반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면서 “어영대장이 보라.”라고 했다.

어영대장 구선복이 “술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성부 당상 정윤명 또한 “술입니다.”라고 했다.

형조판서 홍상한은 “삼해주(三亥酒)의 찌꺼기입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술 이름까지 언급했다. 삼해주는 당시 절기에 맞춰서 가장 흔히 만들었던 곡주 중 하나였다.

영조는 또한 좌우의 호위를 맡고 있는 군병인 순령수들에게 명하여 모두 맛보게 하였다. 모두들 “술입니다.”라고 했다. 그다음으로 연로한 부로(父老)들에게 돌려 보였는데, 부로들조차 모두 “술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부로들까지 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대들은 숙정패(肅靜牌)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라고 했다.

숙정패(肅靜牌)란 조선시대에 군영에 세워 두었던 푯말로 군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할 때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숙정(肅靜)’이라는 두 글자를 나무 패(牌)에 써서 세워 둔 것을 말한다.

영조의 말인즉슨 ‘남들이 이미 술이라고 모두 말했기 때문에 두려운 나머지 자신들도 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말이다.

사실 영조는 아직 술맛을 보기 전이었다. 영조가 숙정패라는 단어를 깨 낸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다시 좌상과 우상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므로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되니 경들이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눈치를 채고서는 “처음에는 술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이에 묻혀서 냄새를 맡아보니 식초와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신하들은 속으로 난리가 났다. 이미 모든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술이다’라고 했는데, 다시 정확하게 확인해 보라는 명을 받은 좌의정이 ‘식초같다’고 하는 바람에 어수선해졌다.

영조는 내시로 하여금 유세교의 술을 주발에 담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술을 들여지지 않았다. 신하들은 술을 대령해야 할지 식초를 대령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주발에 담긴 것은 술 같기도 하고 식초 같기도 했던 것이다.

영조는 한참 뒤에 올라온 주발에 담긴 술맛을 봤다. 그러고 나서는 “나는 처음에 유세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여러 신하의 말을 들어 보니 모두 술이라고 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내가 직접 맛보니 과연 식초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신하 김상로가 “식초로 돌리시니 성상의 뜻이 참으로 어지십니다.”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대답을 한 것 같아 다행스럽게 여겼다.

여러 신하들은 유세교가 식초라고 하고 있고, 영조 또한 식초라고 했기에 무죄로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조는 유세교에게 곤장 8대를 더 때려서 10회를 채우도록 했다.

그러자 김상로가 “술이 아닌 줄 알면서도 곤장을 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영조는 “군자가 있은 뒤에야 소인이 있는 법인데, 만약 술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것이 식초가 되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곤장 2대만 더 때리고 다시는 식초를 만든다는 이유로 누룩을 비축하지 않을 것을 명하며 풀어 주었다.

영조는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를 효시로 삼아 온 백성들에게 음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영조는 유세교를 잡아들인 낭청을 불러 “너는 어찌하여 식초인데도 유세교를 잡아 온 것이냐?”라고 묻자, 낭청은 “식초인 듯하였으나 식초가 아니었고 아직 술맛이 났기에 잡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술잔에 담긴 것을 낭청에게 맛을 보도록 했다. 낭청은 “이것은 식초이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부로(父老)들을 다시 불러 맛을 보도록 했다. 그러자 부로들은 모두 “식초이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영조는 “처음에는 술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식초라고 하는 것이 앞뒤 말이 맞지 않는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냐?”라고 하고는 지금 이후로부터 문을 닫고 집 밖을 나가지 말고 다시는 먼저 궁으로 들어오지 말도록 했다.

사실 유세교는 처음에 술을 빚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각되었을 당시 술이 쉬기 직전으로 술맛과 식초맛이 동시에 났을 것이다. 따라서 낭청이나 부로들이 처음 본 맛은 술맛이 강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식초 맛이 강했던 것이다. 실제로 술이 쉬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식초맛이 강해진다. 신하들은 입맛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이것이 술이냐 식초냐?”라는 물음은 마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밖이 밝으냐 어둡냐?”라고 묻는 것과 같다.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밝다고 할 것이고 나중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둡다고 할 것이다. 모두 맞는 대답이다.

신하들은 흉년으로 인해서 일시적인 금주령을 요청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질지는 몰랐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금주령에 대한 여러가지 폐단들이 나타났고, 신하들의 상소도 빗발쳤다. 그러나 영조는 역정을 내면서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의 금주령은 이후 10년이나 이어졌다.

보통 술에 신맛이 나기 시작하면 ‘술이 쉬었다’라고 한다. 술은 누룩을 이용해서 밀이나 쌀의 전분을 당화시켜 발효가 일어나는데 이때 알코올이 생성된다. 우리는 이것을 ‘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누룩이 남아 있는 상태의 술은 시간이 지나면 과발효되는데, 이때 술 속의 초산균이 초산발효를 일으켜 점차 신맛이 나기 시작한다. 술에 신맛이 나기 시작하면 쉬었다고 하고, 완전하게 쉬게 되면 ‘식초’가 된다.

옛날에는 식초를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막걸리를 만들어서 술을 빚은 다음 일부를 용기에 넣어서 부뚜막 따뜻한 곳에 두면 시간이 지나면 식초가 된다. 이것을 보통 막걸리 식초라고 부른다. 외국에서는 포도주로 식초를 만들어 먹었는데, 바로 발사믹 식초다.

알코올 발효를 거치지 않고 식초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홍시를 오래두면 감식초가 되고, 김치도 오래되면 신맛이 강한 김치물 식초가 된다. 이 경우는 알코올발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초산발효가 일어나는 것이다.

막걸리와 같은 술의 과발효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술이 바로 소주(燒酒)다. 소주는 막걸리를 끓여서 그 증기를 받아내 다시 액화시킨 것을 말한다. 막걸리는 색이 탁해서 탁주(濁酒), 소주는 맑아서 보통 청주(淸酒)라고 부른다.

소주에는 누룩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이상 발효가 일어나지 않아 오래 보관해도 식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와인으로부터 얻은 코냑도 마찬가지 원리다.

중국에도 금주령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한나라 말기에 기근이 심해서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주객들이 술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불렀다.

일례로 한나라를 이어서 들어선 위나라 상서랑인 서막이 몹시 술을 좋아했는데,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 적발되자 “나는 성인에게 중독되었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어느 날 위나라 황제인 문제가 서막을 보고는 “요즘도 성인에게 중독되는가?”라고 묻자, “아직도 자신을 혼내지 못하고 때때로 다시 중독되곤 합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술은 인간의 음식역사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산물이다. 전 세계의 역사를 보면 일시적인 금주령들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발효라는 신기한 현상은 인간에서 술과 식초를 선물했다. 식초는 술을 거쳐야 만들어진다. 그래서 전에는 술이었지만 나중에는 식초였던 것이다. 술과 식초는 한 끗 차이다.

* 제목의 ○○는 ‘식초’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승정원일기> ○ 영조 33년 1757년 11월 18일. 上曰, 酒禁, 近日, 何如? 象漢曰, 悶悶. 南部有捉送者, 卽駕前別抄柳世僑爲名漢也. 又有慕華館·箭串里等處捉來者矣. 上曰, 令前所釀歟? 不測矣, 何以捉之云耶? 象漢曰, 一則堗後置薪而 埋甕云矣. (상이 이르기를, “주금은 근일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상한이 “고민스럽습니다. 남부에 잡아서 보낸 자는 바로 가전별초 유세교라는 놈입니다. 또 모화관과 살곶이 등에서 잡아온 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빚은 것인가? 예측하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상한이 아뢰기를, “한번은 온돌 뒤에 땔나무를 숨겨두고 거기에 항아리를 묻는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영조 33년 1757년 11월 19일. 上曰, 秋曹, 是矣. 分付傳授罪人拿入後, 上命宣傳官, 問以所釀, 於新令之前後, 何居乎? 罪人供曰, 醋也, 非酒也. 上曰, 奸矣。汝直告則可容恕, 不然則當於東郊梟示矣. 決棍二度後, 上命御將諭之曰, 今此下問, 只在令之前後而已, 豈問酒與醋乎? 罪人供曰, 果是令前矣. 右議政申晩曰, 令前後下問之聖意, 可見其至仁盛德, 而渠不知感激, 不爲承款, 無狀矣. (상이 이르기를, “형조가 옳다. 전해 준 죄인을 잡아들인 뒤에 상이 선전관에게 명하여 술을 빚는 것을 신문하게 하였는데, 새 법령 전후로 언제냐?”라고 물었다. 죄인은 공손히 “식초이지 술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상은 “간악하다. 너는 사실대로 고하면 용서해 줄 만하고 그렇지 않다면 동교에서 효시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결국 곤장 2대를 친 후에 상이 어영대장에게 명하여 유시하기를, “이번에 하문하는 것은 단지 명령을 내리기 전뿐이니, 어찌 술인지 식초인지를 묻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죄인은 공손하게 “결과적으로 이것은 명령이 있기 전입니다.”라고 했다. 우의정 신만이 아뢰기를, “전후로 하문하신 성상의 뜻에서 그 지극한 인과 성대한 덕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감격할 줄 모르고 승복하지 않았으니, 한심합니다.”라고 했다.)
○ 上命曳酒甕入之. 上曰, 御將見之. 善復曰, 酒也. 京兆堂見之. 允明曰, 酒也. 秋判見之. 洪象漢曰, 三亥酒滓也. 上又命左右巡令手, 皆嘗之. 皆曰, 酒也. 輪示諸父老, 父老皆曰, 酒也. 上曰, 父老之言酒, 似恐其拿入於肅靜牌之內矣. 上謂左右相曰, 人命至重, 不可不愼, 卿等見之. 尙魯曰, 初似酒矣。染紙而嗅之, 亦似醋矣. (상이 술동이를 운반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영대장이 보라.”라고 했다. 구선복이 아뢰기를, “술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성부 당상이 보았다. 정윤명이 아뢰기를, “술입니다.”라고 했다. 형조 판서가 그것을 보았다. 홍상한이 이르기를, “삼해주의 찌꺼기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또 좌우의 순령수에게 명하여 모두 맛보게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술입니다.”라고 했다. 여러 부로에게 돌려 보였는데, 부로들이 모두 “술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로가 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숙정패 안으로 잡아들임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상이 좌상과 우상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므로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경들은 보라.”고 하였다. 김상로가 아뢰기를, “처음에는 술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이에 뭍여서 냄새를 맡아보니 역시 식초와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 上命宣傳官, 諭于世僑曰, 汝稱三代近侍之人, 而酒禁之下, 尙留麯醋, 是亦罪也. 加棍八度, 以滿十度, 可也. 尙魯曰, 旣知其非酒而加棍, 無乃太過乎? 上曰, 有君子, 然後知小人, 無此酒, 則何以知彼醋乎? 又加棍二度後, 命宣傳官諭之曰, 以御吏書啓觀之, 或有決笞十度而死者. 若滿十度而致斃, 則非生汝之意也, 故只加二度而送之. 此後汝須以麯醋被罪之言, 歸傳閭里, 毋使民間, 復儲麯醋也. 今後人必以汝爲被罪之人, 而當枳塞於軍門, 汝則自同平人而行世, 宜矣. (상이 선전관에게 명하여 유세교에게 유시하기를, “너는 삼대 가까이에서 근시를 지냈던 사람인데 주금을 내렸는데도 여전히 누룩이 남아 있으니 이 또한 죄이다. 여덟 번 곤장을 쳐서 10회를 채우는 것이 가하다.
”라고 하였다. 김상로가 아뢰기를, “술이 아닌 줄 알면서도 곤장을 쳤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가 있은 뒤에야 소인을 알 수 있는데, 이 술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것이 식초됨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